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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월간미술2022년07월호-CRITIC) 박형렬 땅,사람,관계탐구-정희라(독립큐레이터)2022

-정희라(독립큐레이터)

생각해 보건대, 우린 단 한 번도
자연에게
당신 생각을 물어본 적이 없다. 그래도 되는지를
-작가의 노트 中
박형렬은 땅과 대화하듯 작업하며, 이 과정에서 미학적인 조형성을 포착하여 인간과 자연의 구조를 간접적으로 건드린다. 자연을 소유하는 폭력적인 사회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내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땅 혹은 풍경화 되기 직전의 땅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도시에 살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는 사회의 면면에 관심을 가지고 다큐멘터리적 작업을 이어왔다. 그는 우리 삶에서 동떨어진 대자연보다 일상과 밀접한 도시 근교의 땅들을 보았고 그 땅들이 이해로 얽혀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되는 동시에 원래의 모습을 상실하는
순간들도 지켜봐 왔다. 박형렬은 그 모습들을 기록하고 형상화하는 지점을 고민하며 매체의 형식과 시각적 구성을 연구한다. ‘성곡 내일의 작가’ 전시 <땅, 사람, 관계탐구 Reflecting on Relationship: Earth & People>는 박형렬이 사진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연과인간의 관계를 다룬 지난 10여년 간의 작업을 조명하였다.
2010년부터 진행했던 <포획된 자연Captured Nature>은 이번 전시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이 연작은 비닐과 실, 아크릴과 같은 산업적인 물질로 자연을 포획하고자 하는 시도를 설치와 퍼포먼스로 형상화하고 사진으로 기록한 작업이다. ‘포획/캡쳐한다’라는 말은 살아있는 생명을 포획하는 행위와 인터넷상에서 무자비하게 자기 소유로 끌고 오는 캡쳐하는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연작 중 하나인 <포획된 자연_나무#4>는 가느다란 나무를 차지하기 위해 퍼포머 두 명이 나무를 감은 흰색 실과 검은색 실을 양쪽에서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모습을 담았
다. 이러한 행위는 소유를 시도하는 모습을 의미하며 자연을 포획하겠다는 어리석은 포부를 내비친다. 박형렬은 이 같은 개념적 행위를 보여주는 데 있어 실, 천과 같은 도구 그리고 퍼포머들의 의상이나 그들의 움직임이 조형적으로 어울리도록 하였다.
사진의 특성이라 해도 그의 작업은 조형적 구성과 미적 관점이 돋보인다. 2013년부터 지속된 <형상연구Figure Project>는 자연의 조형성 특히 땅의 모습에 주목한다. 상태와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모양과 땅의 성질이 소재가 되어 인간과의 접점을 나타내고자 다양한 방식을 실험해왔다. 예컨대, 2018년도 작품 <형상연구_땅#75-2(북위 37°11'34.2, 동경 126°39'37.3의 돌의 균열으로부터)>는 <북위 37°11'34.2, 동경 126°39'37.3의 돌>의 작업이 선제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간척지에서 발견한 쪼개진 돌을 먼저 사진으로 기록하고 <형상 연구_땅#75>에서 퍼포머들이 땅 위에서 그 돌의 쪼개진 틈새 모양을 재현한다. 결과물인 사진은 퍼포머들의 의상 색과 흙의 색이 대비되고, 광활하게 펼쳐진 땅과 조그마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이어진 모습이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박형렬의 사진과 영상 작업은 때로 규모가 큰 퍼포먼스에 기반을 두기도 하는데, 작업을 위한 설치과정도 퍼포먼스 못지않게 스펙타클하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지배적 구조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가 발생하는 지점들을 찾고 경험한다. 작업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바닷물과 비라도 만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박형렬은 이런 자연의 순간들을 맞이하며 땅과 자연을 몸소 느꼈을 것이다. 2013년 작 <땅과 땅 Earth and Land> 영상 작업에서는 그가 음각으로 조각한 땅 안에 첼로를 켜는 음악가가 등장하여 연주를 시작한다. 비로소 첼로의 소리가 땅의 울림처럼 어우러져 자연과 나누는 교감의 순간이 이루어진다. 미술 작가, 작곡가, 첼리스트 그리고 자연이 함께함으로 땅 안에서, 땅 위에서 작업하며 겪은 그의 내밀한 체험이 협업자들과 공유되며 확장되어 갔다.
박형렬은 간척지 작업을 하면서, 주변의 산들에도 눈길이 갔다. 저 산의 형태는 어떨까 하는 생각에 위성사진을 찾아보았고 산이 댕강 잘린 형태들을 마주했다. 그에게 잘려져 있는 산은 징그러울 정도로 폭력적인 동시에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이러한 이중성이야말로 ‘소비되는 자연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잘린 산의 단면들을 형태만 분리하고 흙의 색들을 단순화시켰다. 이를 아크릴 작품으로 표상화한 것이 이번 전시에서 새로이 선보인 <산의 단면프로젝트A Cross Section of a Mountain Project>이다. 이와 함께 <백색 소음 행위White Noise Gesture>는 당진에 있는 간척지에서 작업하였다. 이 작품은 흰 천으로 땅을 덮어가는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하늘에서 바라본 거대한 천의 느린 움직임은 폭력적인 인간의 행위를 지우는 치유의 퍼포먼스로 보이기도 하면서 이제는 곧 사라질 땅임을 강조하고 인간이 풍경을 정비함을 깨우치게 한다.
위에서 내려다본 자연의 모습은 크레인과 드론과 같은 장비를 동원하여 촬영된다. 실제 대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없는 땅의 모습들은 카메라를 통한 세계가 눈으로 보는 세계와 다르며 실제가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대상과의 거리를 조절하고 화각을 이용하여 구도를 만들고 빛과 같은 촬영의 조건을 건드려 음각으로 조각한 땅이 양각처럼 보일 수도 있게끔 효과를 넣기도 한다. 실제와 작업 결과물 속 대상의 규모와 성질이 상이해 보이도록 유도 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 간의 거리와 관계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다를 수 있음을 드러낸다. 박형렬은 자연의 모습을 탐구하고 땅과 인간과의 관계를 폭로하는 데 있어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룰은 자연 공간에 개입했던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것이다. 규격화되고 기하학적인 도시 구조와 산업적인 이해관계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가했던 최소한의 변형이었다. 그 물리적인 조건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시킨다. 이러한 행위는 자연을 억압된 조건에서 벗어나게 하는 의미로 해석되는 한편, 어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시도에 ‘헛된’ 혹은 ‘덧없는’과 같은 표현이 따라붙기도 한다. 작가의 개입을그대로 두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부 대지미술과는 다르다. 박형렬의 작업은 서로 어울려 작업하고 본래의 모습을 존중하여 되돌리는 모습이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와 존재의 만남으로 비추어진다.
무한의 상호성, 그 지속에의 탐구 - 박형렬 개인전《땅, 사람, 관계탐구》-구나연(미술비평가)2022

-구나연(미술비평가)

-무한의 상호성, 그 지속에의 탐구

박형렬은 십여 년 간 사진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탐구해 온 작가이다. 근대 이후 지금까지, 인간에게 자연은 물리적 객체로 존재해 왔다.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분법의 구도 속에서, 자연의 본래적 힘은 간과되어 인간에 귀속된 환경이자 도구로 대상화되었다. 박형렬은 이에 대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지배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를 사유하고 , 그 근본적 문제의식과 반성적 태도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간의 작업을 망라한 전시가 성곡미술관에서 《땅, 사람, 관계탐구》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이번 전시는 ‘관계 탐구’라는 제목처럼,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박형렬의 꾸준한 고찰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카메라의 중립적 시선 하에서, 때로 대결로, 긴장으로, 또한 파열로 나타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치열한 관성을 담는다. 그가 자신의 작업을 "자연 공간에 변형을 가"하는 "폭력적 징후"와 이를 “실제 자연 공간에서 은유적으로 재구성하고 시각화 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듯 , 그의 작업은 작가의 지속적인 경험과 관찰을 통한 발견이자 전개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펼친 작품들을 크게 네 가지의 테마로 구분하면, <포획된 자연>, <형상연구>를 비롯, 좌표를 통한 기록, 그리고 <백색소음 행위>로 대표되는 영상 작업일 것이다. 각기 다른 접근 방식과 실험의 결과인 이 테마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바탕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경험적 사유에서 파생된 메타포를 통해 움직인다.
먼저 <포획된 자연>은 그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역설적 행위를 설정하고 이를 상징적으로 가시화한다. 예컨대 <포획된 자연_나무 #4>의 경우, 중심에 놓인 앙상한 나무 한 그루에 묶인 여러 개의 끈을 두 사람이 겨루듯 당기고 있다. 수직-수평의 명료한 구도 속에서 당기는 힘의 방향에 따라 팽팽히 대결하고 있는 이 상태는 인간에 의해 변형되는 자연의 모습과 그 무모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대결’만 있을 뿐, 그 어떤 것도 포획될 수 없는 잠정적 힘의 대칭이 존재한다. 자연 풍경의 거대한 직교 가운데에 놓인 인간의 틀은 결국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립적 상태일 뿐이며, 오히려 부동하는 자연의 견고함을 부각시킨다.
이 같은 대비는 <포획된 자연_바다#2>에서도 나타난다. 병렬된 정사각형의 아크릴 판이 늘어선 해변 맨 앞에 한 인물이 바다에 서 있다. 흰색 계열로 펼쳐진 해변의 색감 가운데 인공의 아크릴판과 그 원색적 투명함은 분명한 대비를 이룬다. 수평선을 향해 뻗어가는 기하학의 규칙적 행렬은 풍경의 색을 투과하면서 원근법적으로 전진하고, 그 소실점의 중심에 자리한 인간은 바다의 색을 바꾸어 소유하려는 듯 노란색 아크릴 판을 들고 있다. 부드러운 모래와 물결 위에 공격적으로 자리한 색채의 포획은 이미지의 시각적 변화를 이끌 뿐, 자연이란 객체의 변화로 이어질 수 없다. 즉 <포획된 자연> 시리즈는 자연에 작은 개입들을 설정하고, 그것이 견인하는 어떤 상징적 의미와 마주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완고한 자연의 침묵이자 생명력이다. 그리고 박형렬의 작업은 자연의 야생적 존재 방식을 사진으로 포획하여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정반대인, 자연에 침투한 인간의 작은 상황을 통해 포획 불가능한 자연의 경이를 드러낸다.
요컨대 박형렬의 작업은 한 사람의 신체가 수용하는 자연의 변화가 어떤 생동(vitality)의 상호성에 기인하고 있음을 제안한다. 이에 따라 <형상연구> 시리즈를 통한 파괴와 복구는 결코 유적을 남기지 않는 인간의 흔적을 구현한다. 그는 <형상연구_물#3>에서 크기도 깊이도 알 수 없는 물의 한가운데에 잠시 균열을 내고 형상을 개입시킨다. 그가 만든 틈은 날 선 칼로 도려낸 것처럼 베어져, 이를 통해 수면 아래 존재하던 진 땅이 드러난다. 그 형상은 인간의 근대적 행위가 갖는 수리적 개입, 그리고 자연을 타자화 해 온 태도를 명료히 함축하며 물을 가르고 있다. 이러한 ‘형상 연구’는 인공적 형상과 자연의 형태를 동시에 아우르며 그 대립적 양태를 가시화 한다. 그리고 이것은 직각의 조망적 시선으로 나타나는데, 박형렬이 구사하는 렌즈의 시점은 인간의 눈이 아닌 렌즈의 관점이며, 이를 통해 대상이 가진 본래의 스케일을 무화시키고 객관화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기실 박형렬의 작업에서 스케일의 무화는 렌즈의 시선이 갖는 힘과 깊이 연관된다. <형상연구_땅#72>의 경우, 조망의 구도는 인공적 도시의 패턴과 땅의 토질 사이의 유비를 극단적 부감으로 언급한다. 여기에서 렌즈는 인공과 자연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바라봄’이라는 역할을 냉정히 수행한다. 이 객관적 기록의 시점은 우리가 목도하는 그의 사진이 자연과 인간의 완력적 관계를 화면의 긴장으로 옮기고, 셔터의 전과 후를 동시에 포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카메라의 관점으로 인간화 된 윤리 개념을 증발시키면서도, 애도의 정서가 아닌 경험적 성찰에 접근하게 만든다.
개발을 목표로 사라진 자연에 대한 일방적 변화와 그 상흔을 형상으로 기록한 <산의 단면> 시리즈는 간척 사업으로 통째 사라진 수많은 산들의 등고선을 위성 사진으로 리서치하고, 그 수평적 단면을 간척지 표면에 음각한다. 그렇게 박형렬의 작업에서 좌표로만 남은 산의 존재는 익명적 땅의 표면 위에 형상으로 복구된다. 그리고 그 단면은 인간의 계측적 가치 판단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물질적 신체로 다가온다. 일방적 파괴로 인해 지속성을 박탈당한 자연의 존재가 탈영토화된 상태로 회복되어 사진적 현존으로 남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사진은 길고 복잡한 제작 과정을 거치면서, 파괴된 인간의 자연을 본래적 비인간의 자연으로 환원시킨다. 즉 그의 사진은 결과이기 보다 과정이며, 찰나이기 보다 운동하는 회복이다.
이 점에서 이번 전시의 영상 작업들은 그 과정과 환원에 대한 서사를 전개한 것이다. 3채널 영상인 <백색 소음 행위>는 인공의 건축물로 효율의 장소가 될 당진 석문 간척지 위에서 진행된다. 인간의 일방적 객체로 점유될 그 땅의 풍경은, 극단적 부감과 앙감, 거기에 빠른 속도감 등의 카메라 워크를 통해 그려진다. 척박한 땅의 현재와 피어 오르는 구름의 습기가 공존하는 존재론적 조화는 거대한 것과 쇄말한 것이 간극 없이 맞물려 운동하는 자연의 투명한 호흡을 보여준다. 그리고 점처럼 하얗게 침범한 인간의 불투명한 장막이 모든 것을 덮으며 나타난다. 하지만 이 흰 장막은 자연의 장대함 앞에 이내 크기를 상실하게 되는데, 종국엔 <포획된 자연>에서와 같이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자연의 양태를 역설한다.
특히 영상에 등장하는 흰색 인물들은 로 보여준 간척지 공사 압력으로 갈라진 돌들의 크랙 모양을 <형상 연구_땅#75>에서 흑백 모노크롬의 몸으로 형상화한 것처럼, 이분법적 인공성의 성격을 암유한다. 특히 화면 속 흰색의 움직임은 자연을 가리려 시도하지만, 그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확고함과 나약함을 동시에 지닌 자연의 생동이다. 여기에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백색 소음’은 흰색의 인공성의 ‘소음’이면서, 또한 인식할 수 없으나 분명히 파동하고 있는 자연의 ‘백색 소음’이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백색 소음 행위>는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 인간의 가치로서 갈구되어 변화하는 자연의 상흔을 체화하는 것이자, 결합과 해체를 반복하여 찾아가는 인간과 자연의 변화무쌍한 관계에 관한 관찰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가 <종이 찢기 - 백색>에서 번번이 균형 상태에 실패하는 힘의 대립으로 표상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반성적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박형렬은 자연에 대해 “겉으로는 물질적인 요소로만 보이지만, 자연의 모든 요소들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동시대 자연과 인간의 구조들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작업한다고 설명한다. 제인 베넷(Jane Benette)은 스피노자의 정동적 신체를 들뢰즈가 행위하는 힘과 행위를 견뎌내는 힘으로 구분하여 “그것의 합은 일정하고 동시에 끊임없이 유효하다”라고 한 점을 상기시키고, 이러한 양태는 “지속적인 창조를 수반한다”고 지적한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태도 변화를 강력히 촉구하는 동시대의 이론은 인간의 신체를 벗어나, 각각의 물질이 지닌 수평적 힘의 관계를 통해 지배적 위계가 아닌 생동하는 코나투스(conatus)의 동일성을 강조한다. 하여 ‘포획’이라는 역설로 그 불가능성을 피력하고, 근대의 수리적 합리와 자연 사이의 대립항을 병치시키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람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경험적 차원을 이미지의 메타포로 안내하는 박형렬의 작업은 우리의 육체가 지닌 본질적 상태란 자연과의 무한한 상호성을 통해 유지된다는 지속에 대한 제안일 것이다.

땅과 사진 - 신혜영(미술비평)2019

-신혜영(미술비평)

-땅과 사진

1960~70년대 서구의 대지미술(land art)이 사진과 함께 미술관으로 진입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지미술은 당시 미술관의 높은 벽을 스스로 허물며 밖으로 나간 수많은 시도들 중 단연 선두에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혁신적인 미술 경향이자 동시대미술의 주요 흐름으로 인정받으면서 다시 미술관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사진이었다. 대지미술은 미국이라는 특수한 지리적 요건과 관련된 바가 크다. 그것은 전후 세계 미술 지형에서 패권을 쥐게 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미술 경향 중 하나였고, 일군의 예술가들이 미술관 밖으로 나와 접한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미국의 ‘대자연’이었다. 그들은 대자연의 열린 공간으로 예술을 내보냈을 뿐 아니라 이전까지 일종의 경관으로만 묘사되어 온 자연을 자신들의 작품의 일부분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거대한 규모의 작업 전체를 일별하거나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사진이나 영상과 같은 기록 매체를 통해 다시 전시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는 대지미술뿐 아니라 1960-70년대 새롭게 등장한 퍼포먼스나 개념미술과 같은 여타의 현대미술 역시 유사한 입장으로 일회적으로 끝나버리거나 현장에 참석한 소수로 관객이 한정된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사진 역시 이를 계기로 현대미술의 맥락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이렇듯 대지미술은 미국의 자연 환경과 미술 지형에서 비롯된 고유한 장르로서 그 전개 과정에서 사진과 특수 관계를 갖고 있는 셈이다.

-자연에서 형상을 연구하다
박형렬은 대한민국이라는 특정한 지리적 요건 아래에서 ‘땅’과 ‘사진’으로 작업하는 시각예술가다. 정확히 말해, 그의 작업은 땅을 비롯한 자연에 개입하여 일시적으로 변형을 가하고 그것을 사진으로 촬영해 최종 결과물로 제시하는 방식을 취한다. 표면상 그것은 사진을 통해 제시되는 대지미술의 외양을 띠지만, 작가의 방점은 자연에 대한 개입이 아닌 일시적인 변형을 포착한 사진 이미지이며, 그가 다루는 자연은 결코 넓고 큰 대자연이 아닌 도시 풍경화 직전의 거칠고 척박한 크지 않은 땅이다. 작가는 충주의 남한강 일대에서 시작해 전국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최근 서울과 멀지 않은 경기 서남부 지역에 위치한 개발 이전의 땅에 다다랐다. 예컨대 그 장소는 영종도, 대부도, 전곡항, 화성시 고포리 등 이미 예전에 간척되었으나 다시 다른 용도로 개발되기 전 방치된 퇴적층의 땅들이다. 작가는 이와 같이 개발 전과 후 ‘사이의 공간’에 들어가 크고 작은 개입과 변형을 가하고 그러한 행위가 남긴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자연에 대한 예술적 개입의 측면에서뿐 아니라, 머지않은 미래에 다른 모습이 될 자연 상태의 측면에서도 임시적인 성격을 지니기에 사진이 관여할 당위성이 생기는 셈이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결코 기록의 목적이 아니며, 오히려 원하는 사진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 일련의 행위이자 과정이 선행되는 편에 가깝다.
이러한 박형렬의 사진에서 색감과 질감의 세부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2013년부터 지속하고 있는 <형상 연구(Figure Project)> 이 글에 기재된 작품의 한글 제목은 영문으로 된 원 제목을 기준으로 필자가 임의로 작성한 것이다.
연작은 화면에서 작가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드러내고 땅의 표면이 지닌 조형성을 극대화하는 작업으로 그러한 특징이 잘 나타난다. 언뜻 색면화처럼 보이는 단색조의 사진은 가까이서 보면 한 화면 안에서도 전혀 다른 질감을 지닌 무수히 많은 시각적 세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한 점에서 대형 카메라로 촬영한 큰 규모의 프린트를 플랙시글라스에 압착하는 방식은 세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한 작가의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작가는 동일한 땅이 계절과 날씨에 따라 전혀 다른 색감과 질감을 지니게 되는 점에 주목하였고 그러한 특징을 카메라에 더욱 부각시켜 담아내었다. 수심 깊은 바다의 매서움이 느껴지는 겨울철 검푸른 땅은 여름이 오면 메말라 사방으로 쩍쩍 갈라져 벌집 모양이 되고, 비가 오면 금세 지면이 촉촉해져 물결에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낸다. 그런 한편 같은 계절과 날씨에도 흙의 재질에 따라 땅 표면의 양태가 달라지는 것을 눈여겨본 작가는 자갈, 돌, 진흙, 모래 등 각기 다른 토양의 땅을 사진으로 담아내었다. 예를 들어 산업단지 인근에 위치한 땅에서 발견한 누적된 인공 먼지 층을 찍은 사진은 같은 여름철 갈라진 지면이라 하더라도 자연토양과 달리 폭신한 지층을 이루어 마치 높은 곳에서 숲의 임관(林冠)을 내려다 본 것과 같은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된다. 이렇듯 주어진 조건에서 작가는 땅의 상태에 따라 크고 작은 변형을 가한다. <형상 연구> 중 다수는 기하학적 형태로 땅의 표면을 걷어내어 그 속살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수직으로 하나의 선을 긋거나 선과 선이 만나 각을 이루기도 하고 매번 그 깊이나 높이를 달리 하여 땅의 표면을 파내거나 파낸 흙을 지면 위로 올리는 등 작가의 물리적 개입은 토양의 상태에 따른 질감의 차이와 맞물려, 화면에 드러나는 비교적 단순한 형상에도 불구하고 매 사진마다 전혀 다른 느낌을 불러온다.

-인간에게 ‘붙들린’ 자연
화면의 단순함과 달리 작업의 공정은 지난하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계절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토양의 상태를 살피고, 적절한 도구를 사용해 원하는 형태로 땅에 변형을 가한 뒤 의도하는 프레임 안에 그 모습이 들어오도록 배치하고 부감하여 촬영한다. 규모에 따라 때로는 20~30미터 높이의 고공 크레인 위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야 하고, 의도하는 화면을 완성하기까지 몇 번이고 시행착오를 겪기도 한다. 컴퓨터에서의 후보정이나 현상 및 인화의 단계를 제외하고라도 이처럼 지난한 과정 끝에 하나의 사진작품으로 완성되는 박형렬의 작업은 ‘행위의 흔적’이라는 현대사진의 주요 범주를 잘 보여준다. 작업 과정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변형이 가해진 자연을 촬영 후 손실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지점이다.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회복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를 아는 작가의 신념에 따른 행위일 것이다. 작가는 거대한 중장비가 땅을 파헤치는 개발 장면에 착안해 땅의 표면을 일시적으로 변형시키고 그 모습을 조형미가 부각되도록 사진으로 담아내지만 그 역시 인간의 필요에 따른 자연에의 관여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렇듯 박형렬의 사진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거듭된 질문이 존재한다. 과연 인간이 자연을 소유할 수 있을까.
자연에 개입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보다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특정한 형상을 만드는 데 있어 천이나 실을 이용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화면을 가로지르거나 실제 사람이 형상의 일부분으로 편입되는 사진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진에서 역시 작가의 관심은 인간이 자연에 대적하거나 그것을 통제할 수 없는 미미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데 있다. 촬영 후 바로 걷어낼 수 있는 천이나 실과 같은 인공물을 사용하고, 화면 안의 사람은 얼굴과 몸을 모두 가려 철저히 익명의 존재로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게다가 그러한 사진들에서 사람의 모습은 대체로 인공물의 일부분으로 가려져 있다가 의도치 않은 지점에서 노출되어 실소를 자아내는 식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전작인 <포획된 자연(Captured Nature)>(2010~2012) 연작에서부터 이어져왔다. <포획된 자연>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사람을 포함해 인공적인 것들로 ‘포획된’ 자연을 내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커다란 바위를 투명 비닐로 여러 번 감싸거나 작은 눈덩이들을 하나하나 노끈으로 묶고, 대형 현수막 천으로 땅을 뒤덮는 것과 같이 불가능하고 무용한 일들이다.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산업재료를 사용하여 행하는 이러한 엉뚱하고 과장된 행위를 통해 작가는 인간에게 ‘붙들린’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주변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인간의 욕심으로 벌이는 과도한 개발에 대한 은유이자, 사진 역시 실제를 일정 정도 왜곡하여 ‘포착하는(capturing)’ 인위적 매체임을 드러내는 중의적 표현인 것이다.

-매체의 본성을 통한 미학적 유희
일련의 과정으로 보건대 박형렬의 작업은 대지미술뿐 아니라 특정한 환경에서 벌이는 행위가 강조된 ‘퍼포먼스(performance)’나 자연과 인간의 조우를 탐구한 ‘모노하(もの派)’를 떠올리게 한다. 퍼포먼스는 앨런 카프로(Allan Kaprow)의 ‘해프닝’을 위시해 1950~60년대 회화와 미술관을 벗어나 예술가가 실행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서구의 미술적 경향을 지칭하고, 모노하는 자연재료와 산업재료를 이용해 변형을 최소화하면서 ‘사물’이 주변 공간과 맺는 관계를 탐구하는 1960~70년대 일본에서 활동하던 일군의 예술가 집단의 움직임을 말한다.
또 많은 작업에서 구체적인 미술작품을 참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경우 대부분 미술사의 주요 작품들을 차용해 맥락을 바꾸는 방식을 취하고, 재료나 결과물의 조악함에 비해 지나치게 진지한 태도를 보이는 데서 오는 유머가 핵심이 된다. 예컨대 넓은 들판에 기둥들을 박아놓은 사진은 누가 봐도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의 <번개 치는 들판(The Lightning Field)>(1971)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재료는 아크릴 파이프로 원기둥의 지름 크기를 달리해 원근법을 교란시키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거나, 언뜻 크리스토(Christo)와 잔 클로드(Jeanne-Claude)의 포장된 자연을 연상케 하는 사진은 자세히 보면 크지 않은 식물 주변으로 구멍을 뚫어 모양에 맞게 무늬를 인쇄한 천을 덮었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러한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 원근법으로 인해 실제가 왜곡된다는 사실을 일깨우거나 동일한 규격의 이미지들 안에서 실제 대상의 규모를 달리해 일종의 유희를 꾀하는 것은 오직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카메라를 통해 바라 본 세계는 우리의 육안으로 보는 세계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진의 매체적 본성에 대한 오랜 숙고와 연구를 통해 카메라의 단안을 통한 원근법 구도나 대상과의 거리 및 화각의 조절로 인한 ‘규모의 미학’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손과 눈을 거치면 불과 20~30cm 크기의 아크릴판에 유화물감으로 칠한 나선형 오브제가 지나간 자리는 어느새 로버트 스미스슨(Robert Smithson)의 <나선형 방파제(Spiral Jetty)>(1970)가 되고 경기도 인근의 흔한 간척지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나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색면 추상이 된다.
작가는 계속해서 별다를 것 없는 주변의 자연으로부터 지루하지 않은 미학적 변주를 해나가고 있다. 그 시도는 대체로 스트레이트 사진의 형식적 본성에 충실한 것들이지만, 사진이라는 매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사진이 되기까지의 행위나 개입의 과정으로 영상을 제작하고 영상작품의 시각적 요소를 화면 너머 전시장 공간으로 확장하거나 사진작업에 사용된 오브제들을 전시장에 설치하는 등 관객에게 시각적 감상만이 아닌 몸을 동원한 경험을 유도하는 다양한 현대미술의 시도들을 병행하고 있다. 그 중 대부분이 단순히 여러 매체를 시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작업 세계를 보다 더 잘 드러내기 위한 선택의 당위를 지닌다. 예를 들어, 종이 한 장을 두 사람이 양쪽에서 힘껏 잡아당겨 매번 다른 형태로 찢어지도록 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종이 찢기>(2016)는 찢어진 종이의 모양대로 땅의 표면을 파내고 사진으로 찍은 <형상 연구_땅 58번_종이 찢기>(2016)의 선행 작업이자 독립된 비디오 작품이 된다. 최근작 <형상 연구_땅 75-2번_갈라진 돌>(2018) 작품의 전체 제목은 <형상 연구_땅 75-2번(북위 37°11'34.2, 동경 126°39'37.3의 갈라진 돌)>이고, 위도와 경도를 통해 작가가 돌을 발견해 사진을 찍은 위치는 화성의 전곡항 주변 간척지임을 알 수 있다.

역시 외견상 달라 보이는 두 작품이 선후 관계를 이루고 있다. 작가는 특정 지역의 땅에서 간척사업에 사용된 돌들이 중장비의 압력에 의해 각기 다른 형태로 갈라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각각의 돌을 마치 초상사진처럼 촬영하였고, 이 사진 이미지를 토대로 검은색과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performers)에게 명암을 강조해 돌의 ‘틈(crack)’ 형상을 재현하게 한 뒤 다시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로부터 우리는 작가의 일관된 관심이 여러 양상으로 발현되는 중에 자연스럽게 서로 간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지하고 아름답게
이렇듯 작가 박형렬은 현대미술의 보편적인 조형 언어와 문법을 따르면서도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며 오랜 시간 고민해 온 특수한 상황을 본인만의 고유한 미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제시하고 있다. 부동산 및 개발의 논리에 따라 무작위로 파헤쳐지고 훼손되는 이 땅의 자연을 인간에게 ‘노획된’ 것으로 바라보는 작가는 본인의 일시적인 개입을 통해 일부 변형하여 사진을 비롯한 기술매체로 남기고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놓음으로써 상징적으로나마 그러한 억압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를 위해 그가 행하는 일련의 과정은 매우 진지하고 경건하다. 대지미술이 미국의 특수한 자연 환경과 미술 흐름으로부터 등장해 미술장 안으로 사진을 들이는데 기여했다면 박형렬의 작업은 좁은 땅에서 성찰 없이 자연을 점유하려는 우리의 상황을 이미 동시대 미술장 안에 자리 잡은 사진 매체를 통해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그렇게 그는 한국에서 땅과 사진으로 할 수 있는 독보적인 시각예술 영역을 넓혀나가는 중이다.

-Land and Photography

Let’s think back on the 1960s and 1970s when land art of the West made their way into museums together with photography. Land art was at the forefront of numerous conscious efforts being made at the time to break free from museums walls, but before long received recognition as a revolutionary art movement and a significant trend in contemporary art, making a return back into the museums. Among a series of factors that provided for this development was the role played by photography. The emergence of land art correlates very much with the unique geographical conditions of America. It was one of many movements that began as a protest against abstract expressionism, which had set the stage for America’s dominance of the post-war international art world and what this group of artists encountered outside the museum was the enormous scale of American nature. They not only brought the practice of art out into the open but also incorporated nature—primarily depicted as mere scenery thus far—as their works’ constituents. However, the need to get a good full look at the large-scale works and to reach a wider audience necessitated the intervention of media for documentation such as photography and videography, eventually restoring them back to the exhibition spaces. This, in turn, weaved photography into the context of contemporary art. In this way, there has been a special relationship between the discipline of photography and the development of land art, a genre stemming from America’s natural environment and art world.

-Studying Figures within Nature

Hyong-Ryol Bak is a visual artist who works with the media of “land” and “photography,” within the particular geographic bounds of the Republic of Korea. To be more precise, the process entails executing temporary alterations to nature, starting from land, then photographing them as the final work. On the surface, it resembles land art presented via photography, but the artist’s focus is not on the act of intervening with nature and more on the photographic image of the temporary modification; his subject is not extensive nature, but coarse and barren land. He has wandered around the country, starting with the entire region around the Namhan River of Chungju, and recently reached a soon-to-be-developed land in the southwestern district of Gyeonggi Province located not far from Seoul. These are sedimentary layers of lands found in Yeongjong Island, Daebu Island, Jeongok Port, Gopori in Hwasung, which were reclaimed in the past but are currently neglected, awaiting redevelopment. The artist enters into these “in-between spaces” set in between before and after the development and performs both big and small intervention and adjustments on them, to capture the resulting appearances with photographs. The work exhibits a quality of impermanence as shown in the artistic intervention on nature, as well as the portrayal of nature awaiting a change in the imminent future, which are features that warrant photographic participation. However, documentation is not the purpose of his photographs, but rather the series of actions or steps leading up to the desired photographic image.
In Bak’s photographs, the details of color and texture play an important role. This is highlighted in the series Figure Project, continued since 2013, which represses the exposure of the artist’s intervention, while maximizing the plasticity of the land’s surface. Detailed viewing of each monotone photograph, reminiscent of color field paintings, reveals a plethora of textural visual details within. In this sense, adhering large-scale prints photographed via a large-format camera to plexiglass seems like an appropriate method chosen by the artist to enhance the details of the picture. The artist focused on how the same land exhibits varying colors and textures depending on seasons and weather and accentuated this characteristic when capturing them. The dark blue land of winter evocative of the harshness of the deep sea dries up all over in summer to form into the shape of honeycomb, which then immediately moistens with the rain and creates smooth curves along its ripples. At the same time, he observed how the different materials of soil—despite being in the same weather and season—vary the appearance of the surface of the land and captured different types of soil, each comprised of gravel, rocks, mud, sand, and more. For instance, the photograph of arid land of summer found in the vicinity of an industrial complex with an accumulated layer of dust creates a completely different image with that of natural soil by displaying a cushiony surface reminiscent of viewing a canopy of a forest from above. Thus, the artist considers these given conditions of the land when gauging the degree of alteration to be made. A large number of works within Figure Project follows the procedure of removing the surface of the land in geometric shapes. Whether it be drawing a single line vertically, forming angles with various lines, scooping out or piling the scooped-out soil in varying degrees each time, the artist’s physical intervention coupled with the textural differences arising based on the soil condition evokes completely different sensations in each photograph in spite of the relatively simple figures within the image.

-Nature “Captured” by People

The simplicity depicted in the picture betrays the difficulty of the process. Starting with searching for an appropriate location, the artist observes the change in the quality of soil influenced by the season and weather, uses a suitable tool to modify the land in the desired shape, and positions the camera in the way he wants to frame the scene, capturing it from an aerial viewpoint. At times, the scale of the work requires him to press the shutter button atop a 20-to-30-meter-tall tower crane and has to go through repeated trial and error in order to get to the intended image. Bak’s works are illustrative of one of the main branches of contemporary photography dealing with the theme of “traces of activity,” for the reasons that a single work of his oeuvre materializes following the demanding process of capturing the image alone without the stages of post-processing on the computer and printing. A notable aspect of this process is the restoration of the altered nature back to its original state. It’s as if he is self-aware that his action of temporarily transforming the surface of the land and taking photographs in a way that accentuates its aesthetic form—inspired by the scenery of development where giant heavy machinery digs up the soil—is just another intervention made on nature based on human need. In this way, repeated questioning towards the relationship between human and nature underlies Bak’s photographs. Can human beings own nature?
This question of human involvement with nature is presented more directly in his photographs where fabric or yarn is utilized in the creation of a specific figure that traverses the image more actively, and where actual people are blended as a part of the figure. However, with these works as well, the artist’s interests lie in demonstrating the insignificant presence of humans who ultimately cannot compete against or control nature. He uses artifacts such as fabric and yarn that can be removed immediately after the photographic process, and the faces and bodies of people are covered up to play a fixed role within the image as anonymous figures. Moreover, in most cases, the shapes of people are initially veiled by the artifacts, generating a comical effect when discovered. This is a style that has been continued by the artist since the Captured Nature (2010-2012) series. As indicated in the title of the series, the works display nature “captured” by artificial things, including people. Nevertheless, such attempts prove useless and impossible to attain as seen in the acts of wrapping a giant stone with transparent vinyl many times over, tying one small snowball after another with ropes, or covering up the land with fabric banners. Through these absurd and exaggerated activities carried out with the use of industrial materials commonly seen within the context of daily life, the artist shows the onlookers what “captured” nature resembles. It carries a dual meaning of a metaphor for the excessive developments carried out based on human self-interest without a show of consideration to the surrounding environment, as well as an expression of photography as an artificial medium that, to a certain degree, distorts the reality in capturing the image.

-Aesthetic Play Attained Through the Essence of the Medium

Bak’s works are evocative of not just land art, but performances held within a particular environment or the works by the Mono-ha, exploring the encounter between nature and human beings. He also references specific artworks in many of his works. In those instances, he borrows from major artworks in the history of art but alters their coherence, and the inferior quality of the material and end result creates a comical effect when the works are presented with seemingly-unwarranted seriousness. For example, the photograph of poles stuck on a wide field calls to mind The Lightning Field (1971) by Walter de Maria, but the emphasis of the work is put on playing with perspective by using acrylic poles of varying diameters, or the photograph reminiscent of the wrapped nature by Christo and Jeanne-Claude features holes made around small plants and covering shapes with patterned fabrics. As one can see in these works, enlightening the viewers with the fact that perspective can distort reality or devising a sort of entertainment out of alternating the scales of subjects within the images sharing the same standards are elements that can only be obtained from photography. This is because the world seen through the camera lens cannot equal what we see with our naked eye. The artist has a good command of the “aesthetics of scale,” having spent much time on the reflection and research on the planning of perspective and adjustment of the angle of view as well as the distance with the subject seen through the single eye of the camera. The track made with only 20-to-30-centimeter-long acrylic plate painted in oils transforms into Spiral Jetty (1970) by Robert Smithson and reclaimed land commonly seen in the vicinity of Gyeonggi Province becomes a color-field painting by abstract expressionist painters Mark Rothko and Barnett Newman.
The artist continues to perform engaging aesthetic variations on the nearby nature of negligible importance. For the most part, these attempts stay true to the essential qualities of straight photography but don’t limit themselves within the bounds of the photographic medium. By recording footage of the actions or processes of intervention leading up to the photographic work and extending the visual elements of the video works to the physical exhibition spaces, or installing actual objects used within the photographs, he simultaneously experiments with other forms of contemporary art in order to provide the onlookers with not just visual but also bodily experience when encountering the works. A majority of attempts don’t merely end at the point of having experimented with various media and instead serve as appropriate adoptions to his oeuvre that would help better express his world. For example, his video work Paper-Tearing (2016)—where two people repeat the action of pulling at a sheet of paper from both ends with all their force to tear it into different shapes each time—serves as a stand-alone piece as well as a preceding work for the photograph, Figure Project_Earth#58_Paper-Tearing (2016), capturing the surface of the land scooped out according to the shape of the teared paper. This sort of sequential relationship between two seemingly separate works can also be seen in his recent work Figure Project_Earth#75-2_Fractured Rock (2018) . Upon discovering the unique fracture—which result from the pressure applied by heavy machinery—on rocks used for land-reclamation projects in particular areas, the artist photographed each rock in the manner of taking portraits, and reenacted the figures of the resulting images by accentuating the light and shadow of the cracks with performers clad in black and white clothes to photograph as another work. From these works, we get an understanding of how the artist’s coherent interests cause his works to naturally intermingle while manifesting into various shapes and forms.

-Earnestly and Beautifully

Bak adheres to the prevailing language and grammar of the plastic arts within the context of contemporary art, while presenting his reinterpretation of the specific set of circumstances within Korea seen through his unique sense of aesthetics developed over time as an individual born and raised in the land. The artist, viewing nature as something “captured” by people—considering the unmindful acts of digging and damages made premised on the logic of real estate and development—exerts partial changes to the land through temporary involvement, records the scenery with technological medium beginning with photography, and restores it back to its original state, in order to demonstrate a symbolic emancipation of nature from its oppressed state. The series of actions and steps the artist takes for this purpose are marked by an air of seriousness and reverence. If land art emerged out of the trend of art and the natural environment specific to America and contributed to the introduction of photography into museums, Bak’s works are in search for a more refined expression of the photographic medium—already well-established within the art world—to reflect on the constant thoughtless attempts made to exercise power over nature within limited area of land the country provides. In this manner, he continues to expand the domains of visual art unique to the land and photography within Korea.

text by Hehyoung Shin


포획, 재전유, 포월로서의 사진 행위 - 김성호(미술평론가)2016

-김성호(미술평론가)

박형렬의 작업은 대략 두 가지 제목 혹은 범주로 전개되어 왔다. 하나는 ‘THE CAPTURED NATURE(2010-2012)’이고, 또 하나는 ‘FIGURE PROJECT(2013- )’이다. 그의 작업에서 이러한 두 범주는 개념적 행위와 사진이라는 장르가 서로 맞물려 있다. 대개 그것은 행위 미술이라는 ‘과정 자체’이지만 언제나 사진이라는 ‘결과’로 남겨진다. 전자의 작업이 자연을 포획하고 구속하여 추출되는 파편적 이미지와 메시지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라면, 후자의 것은 인공적 개입을 통해 자연을 재구성하는 다양한 창작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라 하겠다. 두 시리즈의 사진 작업에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포월(匍越)의 미학이 읽힌다. 때로는 ‘드러냄’으로 때로는 ‘감춤’으로 가시화되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찬찬히 살펴본다.

포획
자연은 인간에 의해 포획된다. 지금까지 채취와 사냥이란 이름으로 실제적인 포획이 이루어져 왔고, 풍경(風景)이란 이름으로 관조적인 포획이 펼쳐져 오고 있다. 주지하듯이 어떠한 형식이든지 ‘포획’은 ‘물리적 업악’과 ‘폭력적 지배’를 잉태한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의 존재적 위상을 해체하고 훼손한다.
생각해 보자! 예술은 인간이 미적 개념을 창출하는 인공적 행위이다. 그것은 자연의 본성을 해체하는 인간의 개입이다. 사진 또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포획에 다름 아니다. 사각의 프레임으로 자연을 임의로 절단하고 추출하며, 피사체로 그것을 대상화시키고 한정한 채 묶어두는 것이다. 납작한 2차원 평면 안에 담겨진 사진 이미지는 3차원 시공간의 리얼리티를 결박하여 포로로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작가 박형렬이 지극히 반자연적인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다분히 친자연적 태도로 작업하는 역설적인 방식을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최소한의 인간적 개입을 통해 자연의 숨겨진 본성을 드러내는 일이며, 예술이 할 수 있는 효율적인 자연에 대한 개입을 통해서 드러내는 자연에 대한 성찰이 된다. 이러한 지점은 그의 행위적 사진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보라! 박형렬은 사진 안에 들어오는 피사체인 자연을 먼저 물리적으로 포획하는 작업에 나선다. 즉 사진을 찍기 전, 피사체인 자연을 요철(凹凸)의 형식으로 분해하고 분리하여 보편적 자연으로부터 ‘극(劇)화된 자연(dramatized nature)’ 혹은 ‘만들어진 자연(man-made nature)’을 포획해내는 것이다. 이 포획의 과정에는 자연을 파괴, 해체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적 개입을 시도하는 하이저(Michael Heizer)와 같은 작가들의 〈이중 부정(Double Negative)〉과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반환경적인 대지미술의 조형 언어와는 다른 지점이 노정된다. 예를 들어 박형렬의 그것은 마이클 하이저처럼 계곡을 파헤치거나 크리스토(Christo)처럼 장막으로 대지의 숨구멍을 뒤덮거나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처럼 피뢰침을 땅속 깊이 박아 정복을 꾀하는 과도한 점유가 아니며 대지의 피부를 덜어내고 그 속에 숨은 속살의 지층들을 드러내 함께 보여 주는 최소의 개입이다.
그의 포획된 자연이란 그저 그가 선택한 자연의 작은 테두리 안에서 말라비틀어진 대지의 땅껍질을 벗겨내 대지에게 숨구멍을 돌려주는 일이며, 갯벌을 뒤덮은 간척지의 모래들을 덜어내 원래의 땅이 호흡을 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때로 그것은 실들을 얼키설키 직조해서 작은 풀들 위에 얹어 주는 ‘작은 집’이자, 그들에게 입혀 주는 ‘어여쁜 옷들’일 따름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 행위에서 ‘극화된 자연’이란 그저 작은 연극을 만들어 자연과 벌이는 놀이이며, 그의 ‘만들어진 자연’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자연과 교감하는 자상한 돌봄과 자애(慈愛)로운 보살핌이 귀결시킨 그저 소소한 결과일 따름이다.

재전유
‘스스로 있는 자연’에게 인간이 제안하는 놀이와 더불어 자상한 돌봄과 소통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의 작품 〈The captured nature_Stone#3〉(2011)에서처럼, 자연석 위에 딱지를 더덕더덕 붙이면서 자연을 포획하고 더럽힌 채 그 위에 정복자처럼 고고하게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놀이와 돌봄이 아니라 서구의 대지미술가들이 행했던 자연 정복을 음험하게 시도하는 예술의 자만적인 폭압이 아닌가?
아서라! 그렇지 않다. 그의 작품의 ‘극화된 자연’, 그리고 ‘만들어진 자연’은 오히려 야만적 인간의 행태에 대한 비평을 지향한다. 위의 작품은 예술계 안에서 레드 닷(red dot)으로 사유화를 정당화한 미술시장의 제도처럼 공공의 자연 역시 사유화되는 오늘날 풍토를 비평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그의 ‘만들어진 자연’ 혹은 ‘극화된 자연’을 야기한 ‘자연 포획’은 자연의 해체와 정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비평적 성찰을 권유하기 위한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이자 재구성 나아가 재전유’를 지향하는 것이다.
‘재전유’(re-appropriation)는 ‘전유’를 재고(再考)한다. 달리 말해, 모든 모더니즘적 실천을 해체하고 그것을 다시(re)라는 접두어로 접속시켜 재전유를 실천하는 것이다. 전유의 어원적 의미는 ‘무언가를 가져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련의 행위’이다. 이것은 오늘날 문화 연구에서 “어떤 형태의 문화자본을 인수하여 그 문화자본의 원(元) 소유자에게 적대적으로 만드는 행동”을 가리킨다. 박형렬의 사진 행위에서 그것은 자연을 가져와 자연의 원 소유자인 창조주에게 도전하는 행동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비틀어내는 재전유란 그의 작업에서 ‘창조주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도전’으로 자리 이동시킨다. 의미에 대한 재의미 작용(re-signification)을 실행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브리콜라주(bricolage)처럼 그의 사진 행위가 놓인 맥락을 혼성 차용하여 변경한다. 즉 자연의 개입을 자연의 해체와 정복이라는 본래적 귀결점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놀이와 비평적 소통이라는 아슬아슬한 지점으로 자리 이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재전유에서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해 그 용어를 사용하듯이, 그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야만적 정복을 비판하기 위해서 가장 원론적 단계에서 인간의 자연 해체를 그의 사진 행위에 소환한다. ‘자연과의 놀이’, ‘자연과의 소통’의 언저리를 아슬아슬하게 배회하면서 말이다. 보라! 그가 〈The captured nature〉 시리즈나 〈Figure Project〉 시리즈에서 대지 위 ‘눈밭’이나 ‘땅’ 혹은 ‘물’의 피부를 기하학 도상의 음각(陰刻)의 방식으로 오려내는 일은 분명코 자연을 뻔뻔하게 포획하고 편취하는 방식임에도 지층의 얇은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는 방식의 재전유를 통해서 자연에 호흡 길을 열어주는 친(親)자연적 행위로 전환된다. 작품 〈The captured nature_Sea#1, 2〉(2011, 2012)에서 해변 위에 여러 액자나 색유리판을 올려 ‘자연에 대한 관조적 풍경’을 이중의 얇고 투명한 프레임들로 포착하는 그의 사진 행위는 인간의 자연 정복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진 행위를 ‘자연과의 소통’으로 치환시키는 개념적인 재전유를 실천한다. ‘그만의 친자연적 옷’을 해변 위에 입혀 내면서 말이다.

나아가 작품 (2012)에서 그는 0부터 9까지의 아라비아 숫자를 3.3m²에 해당하는 ‘한 평’(坪)이라는 한국적 숫자 개념으로 재구성하여 가시화함으로써 땅에 가해지는 인간의 정복 행위를 비판하고 땅의 본래적 의미를 재전유하기도 한다.
그렇다. 그에게 있어 자연을 해체하고 포획하는 일련의 사진 행위란 자연에 대해 끊임없이 다시(re)를 제안하고 실천하는 재구성 행위이자 자연의 해체와 정복에 대한 ‘개념적이지만 통렬한 비판’을 위한 재전유인 것이다. 여기에는 그의 영상 작품인 〈종이 찢기(Paper-Tearing )>(2016)의 결과처럼 유형화시킬 수 없는 재전유의 실천들이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시리즈 작품 〈Figure Project_Earth#58_>에서 그에게 포획된 지층의 껍질들이, 마치 종이 ‘찢기의 결과처럼 예측 불가능한 유형으로 그 속살들을 연이어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비판적 사진 행위란 결국 재전유의 조형 전략 위에서 자연과 벌이는 놀이이자 소통 행위라 할 만하다.

포월
자연의 포획을 재전유하는 그의 사진 행위로부터 우리는 최종적으로 어떠한 미학과 대면하는가? 그것을 필자는 포월(匍越)의 미학이라 부른다. 한국의 철학자 김진석이 제시한 이 개념은 한자의 의미 풀이대로 ‘기어서 넘는’ 일련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지칭한다. 그것은 현실 극복과 이탈을 주도하는 초월(超越)과 대립한다. 그것은 탈주의 결과에 박수를 보내는 초월과 달리 현실을 안고 엉금엉금 느리게 기어 넘는 지난한 넘어섬의 과정 자체에 방점을 찍는 행위이다.
이 개념은 그의 최근 개인전 《SLOW-DRAWING》(2015, BMW Photo Space)에서처럼 박형렬 특유의 ‘굼뜨고 느려 빠진 미술 행위’와 만나게 한다. 그의 사진 행위는 낙서나 표현주의적 추상처럼 일필휘지로 기를 쏟아내는 ‘Fast-Drawing’을 실험하기보다 유적 발굴을 실행하는 고고학자처럼 캔버스로 삼은 대지의 지층을 조심스럽고도 세심한 태도로 분석하듯이 ‘Slow-Drawing’을 전개시켜 나간다. 그의 느릿느릿한 드로잉은 때로는 대지 위에 메스를 대고 그 피부를 벗겨 내는 조심스러운 치유의 과정으로, 때로는 실들을 성기게 교차시켜 만들어 낸 커다란 자연의 붕대로 대지의 피부를 천천히 감싸는 치유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볼록의 결과이든 오목의 결과이든 땅과 대면하는 그의 느릿한 드로잉은 ‘기어 넘는’ 느릿한 ‘포월’의 고고학과 의술(醫術)을 실천하는 지난한 노동이 배태되어 있다.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천천히 붓으로 흙을 쓸어내듯이, 또는 배가 아픈 환자에게 메스를 들어 당장의 국소해부학적 치료를 감행하는 것과 달리, 한의사가 경락(經絡)의 주름을 따라 손등과 발등에 천천히 침술을 행하고 묵묵히 낫기를 기다리듯이 말이다.
퍼포먼스를 기록한 그의 사진 행위 시리즈인 〈Figure Project_Earth〉를 보자. 크레인을 동원해서 부감법으로 촬영된 이 사진 시리즈 작업에서, 흰 옷 또는 검은 옷을 입은 퍼포머는 대지 위에 펼쳐진 커다란 흰 천과 검은 천이 만드는 자연과의 경계면을 천천히 포월한다. 퍼포머가 꼬물꼬물 기어가면서 만드는 느릿한 운동의 궤적은 영상으로 기록되어 선보이기도 하지만 병렬의 다면 사진을 통해서 그 포월의 흔적을 중첩시켜 드러낸다.
비교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탈인공의 자연 공간은 지극히 평범한 공간이지만, 작가가 설정하는 ‘극(劇)적 장치’를 통해서 이내 예술적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여기에는 자연과 인공 사이의 대립면 혹은 경계면들이 형성된다. 그것은 일견 대지 위에 그리는 단순한 기하학적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특수한 복장의 인간들이 점, 선, 면의 조형 요소처럼 등장하면서 단순한 추상적 화면으로부터 자연/인공의 경계면을 확장하면서 활성화시킨다. 넓거나 좁은 폭의 인공의 천이 자연의 대지 위를 점유하면서 만드는 추상의 화면 위에 그가 등장시킨 퍼포머(들)이 ‘자연/인공, 자연/예술, 검은색/흰색, 대상성/비대상성, 구상/추상, 정지/움직임’이라는 다차원의 경계면을 복잡하게 형성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경계면을 꾸물꾸물 천천히 포월하면서 ‘하나의 경계로부터 또 하나의 경계로’ 자신의 몸을 확장한다. 이쪽의 경계로부터 저쪽의 경계로 포월하면서도 양쪽의 몸을 다 갖고 있는 재전유 혹은 브리콜라주의 몸으로써 말이다. 그래서 날카로운 하드에지(Hard Edge) 추상의 경계면처럼 보이는 그것은 이내 수많은 경계면을 갖는 들뢰즈(G. Deleuze) 식의 ‘주름(pli)’이라는 메타포의 공간으로 확장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퍼포머들은 자연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진혼제를 벌이고 있는 작가의 샤먼(shaman)적 주술을 대리 실천하고 있는 조력자들(Asst-shaman)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따라서 박형렬이 재구성과 재전유를 실천하는 사진 행위는 ‘관조적인 타자의 풍경’이 더 이상 아니다. 이제 그것은 주체가 풍경을 피아적으로 체험하는 ‘체험적인 피아의 풍경’으로 자리 이동한다. ‘피아(彼我)’란 사전적 의미로 “그와 나 또는 저편과 이편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지 않던가? 그런 면에서 그의 작업에서 ‘피아’란 풍경을 끝없이 대상화하는 모더니즘의 관조적 인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또 다른 주체이다. 달리 말하면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견해 식으로 그것은 더 이상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함께 대화하는 주체로서의 풍경이 된다. 즉 ‘인간/예술/자연’ 사이에서 자신의 몸을 서로 나눠받는 ‘탈대상화된 주체로서의 풍경’이다.
그렇다! 작가 박형렬의 작업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의 자연으로 나가 ‘체화된 몸, 즉 피아적 주체’의 자격으로 벌이는 사진 행위이다. 물론 그의 작업이 때로는 사회적 메시지 생산을 염두에 둔 작위적인 지점과 겹쳐지고 때로는 메타포의 현현을 재구성하는 일에 집착하고 있는 듯이 비추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납작한 평면의 사진이 가질 수 있는 막강한 힘들 중 하나인 재전유와 포월의 미학을 비교적 단순한 ‘메이킹 포토’(making photo)의 전략을 통해서 이처럼 효율적으로 가시화시키고 있다는 지점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A Photographic Action as Capture, Re-Appropriation, and Crept Transcendence

By Kim Sung-ho, Art Critic

HyongyolBak’s work has developed into two themes or categories: The captured nature (2010-2012) and The Figure Project (2013- ). His conceptual actions and the genre of photography are interlocked in these two categories. His works are always represented by the “process itself” of performance art but are always left as the “result” of photography. While the former is to take notice of the shards of images and messages extracted through actions of capturing or restraining nature, the latter is to explore ways of reconstructing nature through an artificial intervention. What is discovered in these two series is aesthetics of crept transcendence that goes beyond the boundary between man and nature. This can be visualized at times by “revealing” and others by “concealing.”

Capture
Nature is captured by man. An actual capture has been carried out in the name of hunting and gathering while a meditative capture has been made in the name of landscape. As is widely known, any mode of capture entails “physical suppression” and “violent dominance.” It deconstructs or destroys the existential status of nature.

Art is practice for humans to conceive aesthetic concepts. It is involved in deconstructing the essential character of nature. Photography can also be described as a human action that captures nature. It arbitrarily cuts and extracts it with a square frame and objectifies, restricts, and binds it as an object. A photographic image captured on a flat two-dimensional surface ties up and enslaves reality in three-dimensional space. We need to paradoxically examine Bak’s nature friendly work method that uses the extremely anti-natural medium of photography. His work discloses the hidden essential character of nature with minimum human intervention and reflects on it through art’s effective involvement in nature. This can serve as the foundation for understanding his performative photography.

Bak’s first work is to physically capture nature, the subject of his photography. Before taking a picture, he dissolves or separates nature and captures it as “dramatized nature” or “man-made nature.” During this process he discloses aspects that are different from the anti-environmental modeling idioms of land art as seen in works like Double Negative by Michael Heizer who makes a foray into becoming violently involved with nature, destroying and deconstructing it. He intervenes in the most minimal way possible by only removing the surface and exposing its strata rather than occupying too much of the land like Michael Heizer did when he dug out a valley, Christo when he covered thebreathing holes of the land with a curtain, or Walter De Maria when he tried to conquer it by driving a lightning rod deep into the ground.

Bak’s action of capturing nature is to give back the breathing holes to the land by peeling away its dried skin and helping the mudflat breathe by removing the sand that was covering it. His practice is nothing but to build “a little home” by intricately weaving thread or making “pretty clothes” for nature. Therefore the “dramatized nature” in his photography can be thought of as nothing more than a game with nature and his “man-made nature” as merely a trifling outgrowth that resulted from both his communion with nature and the considerate care and benevolent attention he paid it.

Re-appropriation
What do a game man suggests to “nature that exists on its own” and attentive care and communicative action mean? His work The captured nature_Stone (2011) features one who stands triumphantly like a conqueror while plastering stickers here and there on a natural stone. What does this man mean? Isn’t this the conceited oppression Western artists inflicted on nature?

That’s not true. His "dramatized nature” and “man-made nature” are rather a criticism of uncivilized human deeds. His series mentioned above is a critical view of the climate today in which nature for the public is privatized. That is, his “capturing of nature” that brings about “dramatized nature” and “man-made nature” is not to deconstruct and conquer nature but to suggest critical introspection into nature through the “minimum intervention in nature,” seeking its reconstruction and re-appropriation.

“Re-appropriation” is a reconsideration of “appropriation.” In other words, it is to deconstruct all modernist practices and practice appropriation again. The etymological meaning of “appropriation” is “a deliberate act of acquiring something.” It refers to “an act of taking over some cultural capital and making it hostile to its initial owner” in cultural studies. In Bak’s photography this can be thought of as an act of challenging the Creator, the original owner of nature. This is to make a shift from “a challenge to the Creator” to “a defiance against humans.” This is because it conducts a work of re-signification. This appropriates and modifies the context his photographic acts are placed in, as in bricolage. That is, he does not drive his involvement in nature to its deconstruction and conquest but transfers it to a game or critical communication.

As this term “re-appropriation” is used to criticize metaphysics, he brings the deconstruction of nature by humans in its original sense to his photographic actions to criticize humanity’s uncivilized conquering of nature, wandering about the edges of “a game with nature” or “communication with nature.” His actions of cutting out the skins of “snowfield,” “land” or “water” in his serialized pieces such as The captured nature and The Figure Project are obviously to capture and plunder nature impudently, but these are converted into some nature-friendly acts to enable nature to breathe through re-appropriation by peeling the thin surfaces of the land away one by one.

In The captured nature_Sea#1,2 (2011, 2012) his photographic action to capture “a meditative landscape of nature” with dual thin transparent frames by placing frames or color glass panels on a beach is a practice of his conceptual re-appropriation through which he replaces his photographic act with his communication with nature while criticizing humanity’s conquering of nature. For this, he dresses the beach with his own nature-friendly “clothes.”

In The captured nature_Earth#9 (2012) he criticizes humanity’s attempts to conquer the land through a reconstruction and visualization of the Arabic numerals from 0 to 9 to represent theKorean measurement, “one pyeong” (평, 坪) equivalent to 3.3m2. To the artist, a series of his photographic acts to deconstruct and capture nature is an action to propose, practice, and reconstruct nature consistently and a re-appropriation for “a conceptual yet biting criticism” of the deconstruction and dominion over nature. There are instances of re-appropriation in this work that cannot be typed, as in his video work Paper-Tearing (2016). It is like the skins of the strata captured by the artist in The Figure Project_Earth#58 exposing their inner flesh in an unpredictable way like in the results of his “paper tearing.” His critical photographic act can be thought of as a game and a communicative action with nature.

Crept Transcendence
What aesthetics do we face in his photographic action of reappropriating the capture of nature? I’d like to call it “crept transcendence” (포월, 匍越). This term or its concept presented by the Korean philosopher Kim Jin-seok refers to all thoughts and actions of “transcending something by creeping.” It confronts “transcendence” (초월, 超越) that means the overcoming of or escape from realities. Unlike the notion of “transcendence” that gives applause to the result of escape, it underscores the process of embracing and transcending realities by creeping. This motivated his intrinsically slow, slack artistic actions presented in his latest art show Slow-Drawing (2015, BMW Photo Space). His photographic action avoids “fast drawing” in which one pours out their energy in scribbles or expressionist abstract paintings. He executes his “slow drawing” just as an archeologist who intends to excavate relics carefully analyzes the surface of the land.His slow drawing at times appears to be a process of healing in which he peels off the skin of the land in an extremely careful fashion or at times as a process of healing in which he covers the skin of the land with a giant bandage made by loosely weaving thread. His slow drawing of the land is derived from his harsh labor putting his archeology of “crept transcendence” and medical care into practice. Unlike any immediate anatomical treatment using a surgical knife, his work is like that of an archeologist who slowly sweeps away earth or that of a Korean medicine doctor who treats a patient with acupuncture and waits for the patient to be healed.

The Figure Project_Earth is a photo series documenting performances. In this series capturing images from a bird’s-eye view, a performer in a white or black garment slowly creeps over the border of nature made up of extensive white and black clothes covering the land. The trajectory of the performer’s slow movements is recorded in videos and photos, disclosing the trajectory of the performers’ crawl.

A non-artificial space relatively uninfluenced by humans is a very ordinary site but soon becomes an artistic space through his “dramatic device.” A point of confrontation or an interface between nature and art is formed here. At a glance this looks like a geometrical abstract painting rendered on the land but it extends or revitalizes the boundary between the natural and artificial with humans in special attire who appear as modeling factors such as points, lines, and planes. This is because performers, who appear in an abstract scene made when man-made clothes occupy a land, shape a multidimensional boundary between nature and art, nature and the arts, black and white, objectivity and non-objectivity, figuration and abstraction, and movement and stillness. A human being expands his or her body from “one border to another,” slowly creeping over the border with the body that belongs to both sides as the body of re-appropriation and bricolage. This seems like the boundaries of a hard-edge painting but soon expands to the space of metaphors that is represented by Deleuzian “pli” with innumerable boundaries.

In this sense performers can be defined as assistants who act for Bak’s shamanistic rituals to recover his relationship with nature. His photographic action of practicing reconstruction and re-appropriation is thus no longer the “other’s meditative landscape.” This has turned to both the “other’s and my empirical landscape.” In his work “other and I” is another subject that enables landscape to escape any modernist meditative perception. According to Maurice Merleau-Pontyian account, this has become a landscape as the subject that we talk with together, not the object that is visible through our eyes. That is, this is “a landscape as the de-objectified subject” that shares its body among “man, art, and nature.”

Bak’s work is a photographic action made as an “embodied body or other’s and my subject” in a vast field of nature where there is nothing visible. Of course, his work at times seems to be an intentional, unnatural attempt at a social message or an endeavor to bring about the reconstruction of metaphors. Nevertheless, it is amazing that he visualizes the aesthetics of re-appropriation and crept transcendence, the potent power flat, two-dimensional photographs may have through a relatively simple strategy of “making photos.”

Figure Project_Statement(2016)

-박형렬

Figure Project(2013-)는 아직 사람의 손이 많이 닿지 않은 자연공간에 물리적인 변형을 가하고 변형된 대상을 부감형태로 기록한 작업이다. 작업이 이루어지는 자연공간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별볼일 없는 지극히 평범한 공간으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대체적으로 벗어나있는 곳이다. 나는 이 공간에 존재하는 자연의 일부에 물리적 실험과 행위를 가하고, 그 과정들을 통해 다양한 시각적 요소들을 만들어낸다. 이때 만들어진 대상들은 촬영 뒤, 없어지는 가변적 풍경이 된다.
Figure Project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는 자연공간을 파내거나 덧대어 입체적으로 구성한 뒤 변형된 대상을 부감형태로 촬영한다. 이 과정은 입체적 장면을 평면화 시키고, 형태의 크기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인간의 규정화된 폭력성에 대해 은유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두 번째는 추상적인 조형형태 속에 실제 인물이 등장하는 작업으로, 이때 인물은 이전 시리즈와는 다르게 개별적인 특징들이 사라지고 설치작업과 함께 구조화되어 나타난다. 주로 천과 실로 제작한 공간 속에서 인물은 그곳을 점유하고 또 다른 형태의 영역을 만들어나간다.
인간의 지배적인 폭력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 The Captured Nature(2010-2012)에서는 자연을 물리적인 형태로 포획하는 설치와 그것을 행위 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냈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연을 재구성하는 행위와 인물을 등장시켜 인간의 자연지배적 욕구로 만들어진 시스템을 이탈하고, 그 과정 안에서 만들어지는 불규칙성을 기록한다. 나는 이 기록 안에서 동시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작업을 진행하며 흥미로운 것은 다 년간 찾은 공간들이 계절적 변화 외에는 아직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 있는가 하면, 멋들어진 건물이나 잘 꾸며진 공원이 들어서 촬영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바뀌어 버린 곳도 있었다. 양을 따지자면 후자의 경우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간신히 존재하고 있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연공간들은 동시대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가치에 아직 부합하지 않을 뿐, 그들의 가치에 부합한다면, 곧 보기 좋게 꾸며질 것이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Figure Project (2013- ) is work that physically transforms untrodden natural space and documents the changes made from an aerial viewpoint. The natural spaces where I create my work are largely ordinary places far from downtown and away from people’s attention. I create a variety of visual elements by applying physical experiments and actions to part of nature in these spaces. The objects created in this process are variable scenes that disappear after being photographed.

Figure Project is largely dependent on two methods.
First, a natural space is reconstructed three-dimensionally by digging into it or adding to it. This modified object is then photographed from above. This process enables me to approach humanity’s defined violence metaphorically through a two dimensionalization of three dimensional objects and an obscuration of the size of the form. Second, an actual person is adopted in abstract form and the person appears structuralized along with my installation, losing his or her individual characteristics unlike in my previous series. The person occupies a space primarily made up of cloth and thread, generating another realm in a different form.

Inspired by my doubts about violence dominating humans, The Capture Nature (2010-2012) series features installations in which nature is physically captured and the humans who perform this action. I escape the system made by humanity’s desire to govern nature through actions and persons who try to reconstruct nature, documenting the irregularity arising from this process. I discover and record new possibilities for the relation between man and nature.

What’s interesting is that some spaces I have visited for several years look just as they did the first time while others have been completely altered by the addition of sassy buildings or well-appointed parks. There are more spaces that have been altered than ones that remain unchanged. Natural spaces that barely survive and seem insignificant might soon be very rapidly transformed if they meet any economic or social value of our time.
영도의 영토-정현(미술비평가/인하대교수)2015

-정현(미술비평가/인하대교수)

박형렬의 사진은 인류의 바탕이자 원천인 대지를 기록한다. 그것은 자연에 바치는 헌사이자 문명에 대한 반성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풍경은 거의 추상에 가깝다. 작가는 대지를 거대한 화면으로 만들어 그 속에서 마치 처녀지를 발견한 탐험가처럼 생경하게 어루만진다. 사진은 이런 낯섦과 기이함을 포착한다. 박형렬의 대지를 향한 시선은 풍경이란 관습을 재해석하면서 동시에 자연과 문명 사이의 갈등을 미묘하게 드러낸다. 부감을 사용했지만 그의 사진은 ‘하늘에서 본 지구’와 같은 감상적인 시선도,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같은 절대주의적 시선도 아니다. ‘하늘에서 본 지구’ 방식의 다큐멘터리가 자연과 문명이 교차하는 지구의 삶을 풍요롭게 묘사한다면, 절대주의 미학으로 포착된 문명화된 도시는 감정이 배제된 기하학적 도형들의 구성물이다. 이처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재현한 세계에서는 인간의 흔적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기하학적이고 인공적인 것들로 채워진다. 이는 예술가의 시선의 방향과 위치가 곧 세계를 인식하는 시대의 지배적 사상임을 알려준다.

박형렬의 사진 속에는 회화, 조각, 설치, 퍼포먼스, 대지미술, 개념미술 등 다양한 미술의 매체와 방법론이 혼재한다. 초기 사진 프로젝트인 <포획된 자연>(2010-2012)부터 이번 전시 ≪Figure Project≫(2015)까지 그는 자연을 주목하고 있다. 그에게 자연은 주제이자 질문이며 모든 사진의 바탕이자 질료이기도 하다. 미술에서 자연은 다양한 방법으로 다루어져 왔다. 대표적으로 서양의 풍경화, 동양의 산수화를 떠올릴 수 있다. 풍경화의 역사는 길다. 풍경은 단지 자연에 대한 미학적 형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하나의 풍경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문명, 문화, 지식과 경험에 의해 다양한 관점과 방법으로 자연을 인식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이 곧 풍경이 아니라 시대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의 풍경이 산출된다. 그러므로 풍경은 인간이 자연을 인식하는 시각적 틀이자 어떤 규범을 의미한다. 즉 풍경이란 인공적으로 구현/재현된 자연에 관한 개념이라 부를 수 있다. 인류사에서 자연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자 본받아야 할 존재였고 오늘날에는 인간과 더불어 살아야 할 존중의 대상이 되었다. 서구의 경우, 르네상스 이후부터 풍경은 일정한 규범에 의해 재현되었고 이 같은 풍경의 미학은 여전히 단단한 관습으로 남아있다. 알다시피 당시의 풍경화란 작가의 경험이나 연구를 바탕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관습적 미술에서의 풍경이란 이데아를 대신하기에 회화 속의 자연은 유토피아를 재현한 것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관습이 된 이상화된 자연의 형상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19세기경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는 사실은 풍경이 곧 관념을 대신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미술사에서 풍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가장 급진적으로 행해진 것은 바로 대지미술의 등장으로 비롯되었다. 1960년대 영미권의 대지미술은 미술관 제도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무엇보다 미술의 만신전이 되어버린 현실을 거절하기 위해 자연을 창작의 매체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작가들의 태도에는 풍경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재해석하려는 의지도 포함되었다. 절대적인 자연을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재현하는 대신 매체로 전환된 자연이라는 개념적 설정은 미술의 오랜 관습을 깨트리려는 저항 정신의 표출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문명화된 예술과 예술의 질료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음을 표명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예술을 보존하는 박물관학적 전시 방식의 거절을 통해 미술에 대한 원론적인 변화가 모색되었음을 증명한다.

대지미술과 포토-다큐멘테이션
흔히 대지미술 하면 거대한 규모를 떠올린다. 하지만 사진의 존재를 제외하고서 대지미술을 논하기란 불가능하다. 대지미술이 갖는 장소-특정적 성격은 이른바 미술관의 전시물로 환원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소멸 가능성, 일시성 때문에 사진의 존재는 더욱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된다. 여기서 사진은 작가가 자연과 교감하고 특정한 방식의 개입의 과정을 기록하게 된다. 이미 동시대 미술에서 결과가 아닌 과정의 중요성은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또 다른 규범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미술의 흐름이 결과에서 과정 중심으로 이행하게 된 원인과 이러한 변화가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대지미술, 퍼포먼스 등은 시각예술이 공간과 물질에 의해 구성되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였고, 이러한 새로운 접근은 과정이라는 시간의 흐름과 체험의 흔적을 요구하게 되었다. 사진이 갖는 기록성은 결과적으로 과정이라는 시간성을 포함하기에 물질과 공간이라는 차원에 하나의 차원을 덧붙이는 기제가 된다. 언뜻 보면 대지미술에서의 사진의 역할이 단지 실제 장소에서 일어나는 작업 과정의 기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진의 역할은 보조적인 수단을 넘어 새로운 작업과 전시의 형식을 만드는 중요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박형렬은 대지미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특히 <포획된 자연> 연작은 대지미술의 전형들인 로버트 스미드슨의 <나선형 방파제>(1970), 마이클 하이저의 <이중 부정>(1969), 발터 드 마리아의 장소-특정적 설치 작업을 차용해 풍경의 의미를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60년대 이후 공간 중심의 시각예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나타난 다양한 시도는 시간-기반의 예술을 향한 도전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진의 결정적인 역할은 바로 대지미술의 일시성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포토-다큐멘테이션이 갖는 의미는 실내 전시가 불가능한 대지미술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과 전통적인 서사 양식을 벗어나 작가 스스로 자연/풍경을 생성하는 과정을 대중에게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고유한 사진매체의 가능성이 이처럼 과정의 기록을 기반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미술비평가 보리스 그로이스는 미술 패러다임이 예술작품에서 예술 다큐멘테이션으로 전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면서 유일한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대신 재생산이 가능한 사진과 텍스트로 만드는 다큐멘테이션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정치학(biopolitics)’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정치학이란 예술 행위를 인공, 가상을 넘어 또 다른 생명, 삶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시한다. 현대미술에서 과정을 기록•전시하는 행위는 주어진 신화적 전형의 바깥에서 예술이 생성되는 과정을 소개하기에 정치학적 함의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박형렬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대지미술의 형식이 어떻게 자연이 풍경의 개념으로 이동하는지를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다. 그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기하학적인 형태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고 기둥을 박는 폭력적 행위는 역설적으로 풍경을 만드는 과정이다. 풍경은 자연이 만들어준 선물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자연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기획된 자연이다. 풍경은 폭력에 의해 탄생한다 해도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부분은 과거 대지미술가들의 이러한 폭력이 관료화된 미술 제도에 대한 반성으로 비롯되었고, 더 나아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연을 이용해 일시적인 설치와 거대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실행했다는 점이다. 이는 곧 문명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새로운 신화를 만들겠다는 야심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박형렬이 대지미술의 표상을 선택한 이유는 오히려 동시대 한국인이 갖는 ‘땅’에 대한 관습에서 시작된다. 대지미술의 형식을 차용한 ’포획된 자연 Earth#9’(2012)는 10평 크기의 사각형 틀 안에 0부터 9까지의 숫자를 새겨 넣어 한국 사회에 팽배한 땅에 대한 맹목적 욕망을 풍자한다. 이후 2013년의 설치 작업은 <포획된 자연>의 이면에 존재하던 암시적인 질문을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그는 레지던시 입주 기간 중 우연히 발견한 버려진 화분에 관심을 갖는다. 오늘날 화분은 자연의 일부라기보다 인공적으로 배양된 사회문화적 산물에 가깝다. 단순히 실내를 꾸미기 위한 장식품부터 자연의 일부이자 생명을 기르는 기쁨까지. 화분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또 다른 욕망을 보여주는 상징일 것이다. 버려진 화분을 모아 레지던시 주차장 가운데로 모아 실제로 장소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든 <조용한 시위>(2013)는 ‘포획된 자연’이 어떻게 소비되고 파괴되는지를 선언하는 일종의 상황주의적 사보타주로 ≪Figure Project≫ (2013-2015)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영도의 영토
≪Figure Project≫는 버려진 화분에서 발견한 자연과 문명 간의 부조리를 영토로 확장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대지미술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일종의 영토의 개념을 제시하는 듯하다. 사진의 프레임은 견고한 무대를 연상시킨다. <포획된 자연>이 자연이라는 배경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포착한 사진이었다면

는 나스카 라인과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선과 도형들을 전미래(previous future)를 연상시킨다. ‘Figure Project_Water #3’(2013)는 마치 포토콜라주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데, 호수 가운데 마름모형의 철판으로 구조물을 세운 뒤 공중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말레비치를 연상시키는 흰 바탕 위 검정색 도형과 흰색 천으로 대지 위에 선을 긋는 퍼포먼스 작업은 마치 땅따먹기 놀이를 하듯 대지 위에 영토를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작업에서는 조각적인 성격이 부각되었던 반면 이번 작업은 평면 회화의 성격을 강조한다. 원근법을 없애고 지도를 만든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접근은 전작이 대지미술의 표상에 많이 의지한 것에 비해 서서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특히 영상 작업은 자연/대지가 인간/존재의 개입으로 포획되고 ‘영토화’되는 과정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사실 대지미술은 자연에 대한 사실주의적 재현이나 낭만주의식의 숭고미를 벗어나 실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방식으로 땅과 자연을 선택했다. 자연과 대결하는 웅장한 대지미술 이외에도 문명을 벗어나 자연으로의 회귀를 체현한 리차드 롱, 대지와 여성의 관계를 연결한 아나 멘디에타의 퍼포먼스, 도시 속에 개입하는 참여 예술가 고든 마타-클락, 누보 레알리즘의 선언적 해프닝을 벌린 이브 클랭, 도시의 요소를 레디메이드로 상정한 에드 루샤의 포토-다큐멘터리까지 대지예술의 범위는 개념미술, 여성주의, 행위예술, 사진 등 매체와 형식을 아우른다. 1960년 이후 서구 미술이 실재를 소환했다면 21세기 동시대 시각예술은 생산과 소비 간의 균형이 무너진 세계화 시대의 실재란 무엇인지를 추적한다. 박형렬은 한국 사회의 현실과 자연 간의 비대칭의 관계를 대지미술의 형식을 차용해 한국적 대지미술과 동시대 조형사진의 새로운 영역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자연으로서의 대지와 사회적 욕망으로서의 토지 사이의 갈등으로 비롯된 그의 수행적 사진(performative photography)은 대지를 무대처럼 활용한 연극적 실험을 거쳐 현재는 대지 위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영도의 영토’를 개척 중이다.

The Territory of the Zero Degree

By Hyun Jung, Art Critic & Inha University Assistant Professor

Hyongryol Bak’s photographs are a record of the land as the foundation and source of mankind. They seem to be a eulogy to nature and a reflection on civilization. Landscapes on show at this exhibition are almost abstract. The artist turns pictures of land into an enormous scene and strangely touches it as if an explorer discovers virgin soil. His photographs capture unfamiliarity and idiosyncrasy. Bak’s view of the land is either a novel reinterpretation of landscape or a subtle revelation of conflicts between nature and civilization. Employing a bird’s-eye view, his photographs appear neither maudlin like “earth seen from the sky” nor absolutist like Russian avant-garde art. While a documentary filmed from a bird’s-eye view depicts life on earth where civilizations intersect with nature as something enriched, a civilized city captured by absolutist aesthetics is a thing made up of geometrical figures where are feelings excluded. As such, traces of humanity are replaced with geometrical, artificial things in a world manipulated by socialist ideology. This announces that the direction and location of an artist’s eyes can be a dominant ideology through which to perceive the world.

Bak’s photographs are a mixture of diverse artistic media and methodologies, such as painting, sculpture, installation, performance, land art, and conceptual art. In his oeuvre from his early photo project The captured nature (2010-2012) to his recent series The Figure Project (2015) he has paid attention to nature. To the artist, nature is either the theme and question or the ground and material for all photos.Nature has been addressed in a lot of different ways. Typical examples are Western and Eastern landscape paintings. This genre of painting has a long history. A landscape is not merely the aesthetic form of nature; it is the thought to perceive nature from diverse perspectives and in various ways based on civilization, culture, knowledge, and experience. That is to say, landscapes of different types are produced in accordance with age and area. Thus, a landscape is a visual frame in which humans perceive nature, as well as some norms. In other words, a landscape can be referred to as the concept of nature artificially realized and represented. In human history, nature has been the object to be overcome and emulated as well as an object to be respected. Since the Renaissance in the West, landscapes were represented by a certain standard, and the aesthetics of landscapes still survive. As is widely known, landscape paintings at that time were not painted based on any artist’s experience and research. As landscape in conventional art is a substitute of Idea, nature in painting is a representation of a utopia. The fact that an attempt to escape the form of idealized nature could be made around the 19th century reflects landscape's replacement of an idea.

In art history, our perception of landscape underwent a rapid change due to the emergence of land art. Western land art in the 1960s was a movement that rejected the museum institution. Artists began using nature itself as a medium. These artists showed their will to reinterpret landscape painting as a genre. The establishment of this concept, nature converted to a medium instead of representing absolute nature as sublime beauty, is an expression of a spirit of resistance to break down long-standing conventions in art. This shift in the perception of nature denotes those artists’ rejection of civilized art and artistic material, moreover proving that they pursued some elemental change in art through their refusal of museological exhibition.

Land Art and Photo-documentation
When it comes to land art, what first brings to mind is its giant scale. However, photography is indispensable in discussing land art. Works of land art cannot be reduced to exhibits at a museum due to being completely site specific. Photographs are more important in land art owing to temporality of the works. Photographs in land art document the artist’s communion with nature in their specific fashion. The importance of a process in contemporary art, not its result, has been another norm. We need to note that why the flow of art has turned process-centered from result-centered and how the meaning of this change can be interpreted. As is widely known, land art and performance were attempts to get over the limits that visual art is composed of space and matter. This new approach requests the passage of time and the traces of experience. As recordness photography retains includes temporality of a process, it can be the characteristic to add another dimension to the dimension of matter and space. Photographs in land art can be understood to play the role of documenting a work process. However, they assume an important role of creating new work and exhibit form, moving beyond its ancillary part.
Bak seemed profoundly influenced by land art. In particular, The captured nature series is a reinterpretation of the meaning of landscapes through an appropriation of Robert Smithson’s Spiral Jetty, Michael Heizer’s Double Negative, and Walter De Maria’s site-specific installations. As mentioned above, various attempts to go beyond the limits of space-centered visual art since the 1960s were also challenges to time-based art. The decisive role of photography here was to document the temporality of land art. Photo-documentation is thus meaningful in that the land artist is able to present and display land art that is impossible to exhibit indoors while simultaneously escaping any conventional narrative types. This documentation of a process shows the possibilities intrinsic to the medium of photography.
Art critic Boris Groys asserts a paradigm shift from artwork to art documentation. Quoting an assertion by Walter Benjamin, he denotes that a presentation of documentation in which works of art are reproduced in photographs and texts instead of exhibiting them reflects biopolitics. Biopolitics here refers to another possibility that an artistic act may have another life or another value. He seems to consider that the act of documenting and displaying a process in contemporary art includes some political connotation as it introduces the process of creating art outside any given mythical archetype.
We are able to observe how nature in the form of land art brings us to the concept of landscape in Bak’s work. His violent actions such as digging in the ground and cutting geometric shapes are paradoxically a process of creating a landscape. His landscapes are not a reproduction of nature but a manipulation of nature. It would not be wrong to say that all landscapes in land art were produced by violence. What’s noticeable is that violence by land artists stemmed from their reflection on the bureaucratized art institution and they executed temporary installations and enormous projects to overcome this by using nature. This can be interpreted as a criticism of civilization or an ambitious will to create a new myth.
In contrast, Bak’s manifestation of land art derived from Korean people’s mores concerning land. The captured nature#9 (2012) that appropriates the form of land art is a bitter satire on the blind greed for land that stalks Korean society by adding numbers from 0 to 9 in a square frame measuring about 33 m2. Afterwards, his 2013 installation explored a suggestive question raised by The captured nature series. Abandoned flowerpots he found while staying in an artist-in residency drew his attention. Such flowerpots today are artificially cultivated social, cultural products rather than part of nature. They can be a symbol of another human desire to decorate a room or to feel the joy of growing life forms. Silent Protest(2013), which the artist actually made the residency’s parking lot, can be seen as a transitional work to move to The Figure Project (2013-2015) to a situationalist sabotage that demonstrates how “captured nature” is consumed.

The Territory of the Zero Degree
The Figure Project displays a territorial expansion to the absurdity between nature and civilization that Bak discovered in abandoned flowerpots. This project seems to present the concept of some territory, immune to land art. Its photographic frame is the remainder of some solid stage. While The captured nature consists of photographs capturing events held against the backdrop of nature, The Figure Project reminds us of a previous futurewith lines and figures reminiscent of the Nazka Lines and pyramids. The Figure Project_Water#3 (2013) that looks like a photo collage is an aerial photograph featuring a structure with a rhombus-shaped steel plate set in the very middle of a lake. Redolent of work of Kazimir Malevich, a performance work drawing lines on the land with black figures on white ground and white cloth look like drawing the lines for a game of hopscotch. Sculptural traits were underscored in his previous works whereas this work underlines the character of two-dimensional painting. This approach, that seems to be an attempt to produce a map without relying on any perspective, enables us to catch a glimpse of the gradual construction of his own world while his previous work was heavily dependent on land art. His video work demonstrates a performance that represents the process of capturing and territorializing nature or land through human involvement.
Land art employs land and nature to approach reality, departing from any realistic representation or romantic sublime beauty. Land art encompasses a wide range of mediums and forms such as conceptual art, feminism, performance art, and photography, as seen in work of Richard Long who has realized his return to nature alongside magnificent land art that confronts nature, work of Ana Mendieta who has linked land to women, work of Gordon Mata Clark who involves a city, work of Yves Klein who executed happenings of Nouveau Réalisme, and photo-documentary work of Ed Ruscha who has regarded urban elements as readymades. Bak has presented a new Korean-style land art and formative photography of the times through an appropriation of the idioms of land art, signifying an asymmetric relationship between reality in Korean society and nature. His performative photography stemming from conflicts between land as nature and land as a social desire has been developing the territory of the zero degree after theatrical experiments in which land was used as a stage.

박형렬 전 리뷰- 황록주(미술평론가) (2013 2. 28 ~ 4. 10, 송은아트큐브)(2013)

-황록주(미술평론가,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 40여년 전, 리처드 롱이라는 영국의 한 예술가는 척박한 고원 하나를 넘어가면서 발길에 채이던 돌덩이들을 덤덤히 한 줄로 늘어놓았다. 아무렇게나, 그저 바람과 비에 씻기고 흐른 대로 늘어서 있던 그 돌은 그렇게 한 사람의 발걸음 뒤를 따라 간단한 질서를 얻게 된다. 작가는 본인이 남긴 별 것도 아닌 흔적을 역시나 무덤덤하게 사진으로 담아낸다. 예술가가 지나간 흔적. 폭력도 강제도 그 어떤 불편함도 없이, 다만 지나갔노라 하는 편지 한 장처럼 남아 있는 제 걸음의 흔적. 그것은 사는 동안 우리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살고 난 뒤에도 자연에게 해하는 일 없이, 지나고 난 뒤에도 황폐해지는 일 없이 그저 그 자연과 더불어 한 생을 사는 일 말이다. 땅 위에 남겨진 그 흔적들을 우리는 이름하여 ‘대지미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오늘날, 여기 박형렬이라는 또 한 명의 예술가가 있다. 지난 선배들의 걸음처럼, 그 또한 무던히 자연의 한 장면을 바꾼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더 많은 생각이 들어가 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아라비아 숫자를 1평짜리 면적을 가진 크기로 땅 위에 쌓아 새긴다. 조금 더 적극적인 흔적이다. 수로 점철된 세상을 향해 사람이 자연을 얼마만큼 전유할 수 있는가 되묻는 일이 더해지는 것이다. 거대한 크기로, 막강한 힘으로 가끔 그 대상을 정복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그 누군가에게 간단히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 잠시 가두어졌다가도 이내 회복하는 것이 자연이라는 것을 나지막이 일러준다. 그가 포획한 자연은 바로 그 착각이 다만 착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잠시 동안의 이벤트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것이 남아있던가를 살피기 어려울 만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작가는 그 우매함을 깨치는 순간에 번쩍 플래시를 터뜨리듯 사진 한 장을 남긴다. 크레인 위로 올라가, 전능한 신의 눈으로, 사람이 벌인 일을 살피는 것이다. 그 어떤 실용적인 목표도 없이 벌인 그의 작업이 결국 지난 날, 대지미술처럼, 한 장의 사진으로 우리를 깨운다.
작가는 2013년에 경기창작센터에 입주해 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의 얼굴을 찍다가 어느 날 그 사람들의 숲 너머에서 드러나 보이는 것을 찍어야겠다 마음 먹게 된 작가는, 간결하고, 유머러스하며, 뒤통수를 얻어맞고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 만큼 영리한 작품으로 관객을 흥분시킨다. 올 한해 대부도에서 펼쳐질 그의 프로젝트가 기대되는 것은 아마도 그렇게 또 한 번 기분 좋게 뒤통수를 얻어맞을 일이 기다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그렇게 대놓고 야단쳐줄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다.

박형렬의 자연, 생명을 포획하다-백곤(미학) / Bak Hyong Ryol’s Nature, Capturing Life (2013)

-백곤(미학)

우리는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런데 이 말을 계속 반복해서 읽다보면 말이 어색해지고 의미의 혼동이 옴을 느낀다.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가? “자연스럽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리려면 우선 “자연”을 자연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자연과 같다는 느낌의 “스럽다”라는 접미사를 붙여야 한다.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은 이러한 의미 분석은 단순히 단어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에 대한 중요한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 “자연을 자연으로 본다”는 동어반복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될 때 그 참뜻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인간적 필요에 의해 구성된 자연을 많이 접한다. 그렇기에 최초의 “자연”에 대한 동경과 염원을 기리는 말로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최초의 “자연”의 의미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근대적 사유의 주체로 물든 인간들의 전유물인 이성은 이 “자연”을 주체의 대척점인 하나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데카르트가 그러했듯이 이 자연은 균질한 공간으로 구성된 단지 연장의 사물인 것이다. 그리고 영혼을 가진 인간의 정신은 이 자연을 조정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자연은 이제 주체에 의해 특정 목적으로 구성되거나 무목적의 목적에 의해 주체의 사유속에서 개별적인 의미로 수용된다. 이는 바로 자연이 인간에 의해 “포획”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포획”의 단어는 작가 박형렬의 작업 전반의 걸친 예술적 주제이기도 하다. 박형렬은 <포획된 자연>이라는 일련의 시리즈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특히 그는 인간이 자연을 사냥하듯 포획하는 과정에 생기는 많은 사회적, 문화적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작업은 자연환경에서 실제 설치 및 퍼포먼스로 행해진다. 자연에 대한 그의 일련의 모든 행위들은 사진이미지로 포획된다. 박형렬에게 “포획”은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폭력적 행위들을 고발하는 하나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1. 포획의 행위, 대상이 된 자연
박형렬의 <포획된 자연 The captured nature>은 “자연”의 의미가 사회와 인간의 인식 속에 어떻게 수용되며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마치 낚시꾼이 낚시를 하듯 줄에 걸린 물고기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형상과 닮았다. 혹은 사냥꾼이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 사냥감인 사슴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자세와 흡사하다. 그의 일련의 시리즈는 “지구”, “물”, “자연” 이라는 포획하려는 자연을 인간이 어떻게 사냥하고 있는지를 직접적, 혹은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초기 작품은 인물사진이 주를 이루는데 2006년에서 2009년까지 제작한 시리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자신의 일터에서 하나의 사물처럼 서 있는 사람들과 웰빙을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박형렬은 “자연”의 의미를 읽어내고 있다. 그는 질문한다. “외적환경이자 내적 심리상태의 발현인 자연이 얼마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인가?” 그리고선 물질적인 가치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위트 있게 답한다. 웰빙을 위한 사람들의 집착은 담장너머의 포도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 담을 넘는다거나 환풍기사이로 삐져나온 몇 줄기의 나무를 잡기위해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이 우스꽝스러운 풍경이라고 말이다. 인간에게 자연은 하나의 물질이자 소유의 대상이라는 말은 바로 그 대상에 포획된 주체의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포획”의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간이 자연을 소유할 수 있다는 믿음, 그 근대적 믿음을 실현시키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대자연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박형렬은 그의 사진 작품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박형렬은 인간의 삶의 풍경 전반에 실재하고 있는 이러한 여러 행위들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으로 나가 사진을 찍는다.

2. 의식의 소유물, 포획된 자연
박형렬의 작품은 실제 자연환경 속에서 인간이 자연을 포획하는 행위를 위트 있게 보여주는 것으로 비닐봉지나 끈, 천 등을 통해 실제 포획에 집중하는 초기 대상화된 자연과 숫자, 도형, 색 등 추상적인 관념을 드러내는 최근의 개념화된 자연으로 나뉠 수 있다. 실제 자연환경에서 인간이 행하는 인위적인 포획의 과정은 마치 하나의 나무를 양쪽에서 실을 묶어 끌어당기는 흑백의 팽팽한 긴장감에서 보여지듯 하나의 대상인 자연을 소유하기 위한 인간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가져갈 수 있게 포장된 자연과 실제 자연스러운 자연이 공존하는 우스꽝스러운 풍경은 인간의 의식에 의해 다시 포획된다. 자연을 포획하려는 사냥꾼인 인간과 그 인간에 의해 포획당하는 거대한 사냥물인 자연 중 어느 것이 실재로 포획당하고 있는가? 박형렬은 자연에 행하는 인간의 오만적인 행위를 고발하는 것을 넘어서 예술적 헤프닝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자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를 위해 그는 오랜 시간동안 실제 자연환경 속에서 고생스러운 밑 작업을 감행한다. 바로 한 장의 사진을 위해서 말이다. 초기 자연의 “포획”에 초점을 맞춘 행위들에 집중한 것과 달리 최근 작품은 인간이 포획하는 자연 그 자체에 중점을 둔다. 인간에게 자연이란 어떠한 의미인가? 단지 하나의 대상으로써 수용되는 물리적인 환경인가? 그는 이 자연이 인간의 의식 전반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자체라고 생각한다. 인간들은 이 이데올로기적 가치에 집착한다. 부동산 땅값의 오르내림의 숫자에 민감해하고, 재개발과 경제적 가치를 위해 과감하게 자신이 평생 살았던 집을 부셔버리는 인간의 행위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인간의 의식 기저에 흐르는 근대적 주체의 믿음을 끊임없이 증명한다. 이성의 주체인 인간은 자연을 자신의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영원한 노예인 자연은 결코 인간과 겸상할 수 없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에 포획된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제적으로 포획되었든 정신적으로 포획되었든 상관없이 인간의 주체에 의해 포획된 것이라면 그 자체로 의식의 소유물인 것이다. 이 오만한 인간들의 영원한 소유물인 “포획된 자연”을 위해 사람들은 땅을 파고 물길을 뒤틀어버린다. 인간은 언제 이 자연을 사고파는 행위를 멈출 수 있을까? 박형렬은 인간이 행하는 이 의식의 무거운 짊을 대신 짊어지는 일종의 고행과도 같이 실제 자연환경에서의 묵묵한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 행위는 바로 자연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땅을 파고, 개울과 들판에 행위의 그림을 그리는 박형렬의 예술적 행위인 것이다.

3. 생명과 해방을 위한 포획
다시 “자연스러움”의 이해로 돌아가 보자.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가? 오늘날의 자연은 자연스럽게 살아가기에 어려운 환경과 세상 속에 노출되어 있다. 박형렬는 인간들의 손과 욕망이 닿지 않는 자연은 없으며, 경제적인 혹은 정치적인 희생양은 언제나 자연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그의 예술적, 문화적 행위는 그 희생양이 된 자연의 의미를 본래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자연 스스로의 주체와 의미로 넘겨주고자 한다. 인간에 의해 객체가 된 물리적인 자연이 아니라 바람과 계절의 변화를 가지고 있는 대자연의 주체로서 자연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터전은 다름 아닌 인간의 의식에 자리 잡은 강압적인 지배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일이다. 그 해방은 우리들 자신에게 향하는 것으로 물질과 자본, 경제적 가치로부터 벗어나서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로서의 인간을 바라보라고 권유하는 손길과도 같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될 것인가? 인간은 자연과 인간 스스로를 위해 끊임없이 그 해방의 길을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해방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자유로워진 다음엔 어떤 길을 찾을 것인가? 해방은 단순히 벗어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질문은 다시 인간에게로, 자연에게로 회귀한다. 해방은 바로 “살아있음”, 즉 “생명”의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이다. 박형렬은 작업을 통해 이 생명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가 “포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 때 이 포획에는 살아있는 존재를 포획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포획된 자연>은 생명이 있는 자연을 사로잡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적 인간의 의식에 의해 사로잡힌 자연을 향한 그의 고단한(실제 자연환경에서 오랜 시간 준비하는) 행위는 자연의 살아있음에 대해, 또한 그것의 해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이성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서두에서 말한 바대로 “자연을 자연으로 볼 때” 가능하다. 자연을 살아있는 생명을 가진 자연 그 자체로, 인간의 의식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는 자연의 주체, 자본의 권력에 의해 파헤쳐지지 않는 자연의 호흡 그대로를 바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연을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의 “인간스럽다”라는 말이 “자연스럽다”처럼 자연스러울 때 또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다. 그러므로 박형렬의 예술은 단지 자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향한 것이다.

- Paik, Gon Aesthetics
Bak Hyong Ryol’s Nature, Capturing Life

We often use the word, ‘natural’. If repetitively reading this word, we feel some awkwardness and confusion in its meaning. What is natural? We first of all see ‘nature’ here as nature, and then add the suffix ‘-al’. This analysis of meaning may seem of little significance, but it is not simply describing a word: it is posing a very important question concerning nature and our view of nature. What can we say about the tautology, ‘seeing nature as nature?’
We humans often meet nature reconstructed out of our necessity. Thus, we often use the word ‘natural’ to express our longing and wish toward the first ‘nature.’How much do we know about the meaning of this nature? As the subject of modern thinking, reason defines this ‘nature’ as an object antithetic to a subject. As Rene Descartes believed, this nature is seen as an extended object composed of homogenized spaces. The human spirit has confidence that this nature can be controlled. Nature is now constructed depending on the subject’s specific objective or embraced as an individual meaning within the subject’s thought by purposeless purpose.
This means nature is captured by man. This word ‘captured’ is the artistic theme penetrating throughout Park’s oeuvre. Bak Hyong Ryol alludes to the relation between nature and man through his series The Captured Nature. He addresses many social and cultural problems raised in a process of capturing nature as if hunting her. His work consists of installation and performance in the natural environment. A series of his actions toward nature are captured in photographic images. Bak’s Captured Nature series accuses humans of their atrocity and violence against nature.€

1. The act of capturing, nature as the object of this action
Bak Hyong Ryol’s The Captured Nature derived from the question, “how the meaning of ‘nature’ is embraced and exists in society and human consciousness”. This looks like the form an angler takes the fish hung on the fishing line here and there or the posture a hunter persistently observes his game, deer. His series directly or metaphorically shows how humans hunt nature, the earth, or water. His early pieces that are mostly figure photographs, such as Working People and Well-being series encapsulate the scene of those living in this era. Bak reads the meaning of nature in those standing like things in their workplaces and those claiming well-being. He questions that “How nature is important for humans as a manifestation of external environment and internal psychology?”And, he answers to this question in a witty manner through those concentrating on physical value. Their obsession appears as ridiculous scenes such as one climbing over a wall to water a grapevine over the wall and one struggling to catch a few tree stems sticking out of a ventilator. The subject captured by nature rather believes that nature is a material or object of possession for the subject. The meaning of ‘capturing’starts here. Through his photographic work, Bak tries to prove that it is a careless act against Mother Nature to believe that humans can possess nature and human desire to attain. He takes photographs in the open air to showcase such actions in the aspects of human life.

2. Possessions of consciousness, captured nature
Bak’s work, wittily displaying a human act of capturing nature in the actual natural environment, is largely classified into two types of nature: early objectified nature in which Bak tried to capture it with vinyl envelopes, strings, and cloth; and recent conceptualized nature revealing abstract notions through numbers, figures, and colors. As seen in the act of pulling the string binding a tree from the two sides, generating tension, a process of artificial capturing in the actual natural environment reflects human desire to possess nature. A ridiculous scene in which nature is wrapped to be taken by man and an actual nature coexists is captured by human consciousness again.
Man, a hunter trying to capture nature and nature, an enormous game captured by man-who, or what, is actually captured? Bak raises humanity’s arrogant actions against nature to an artistic happening, moving beyond denouncing such actions. With this he has viewers meditate the meaning of nature. He willingly undergoes sufferings for base work of his photographs in the actual natural environments. While in his youth Bak focused on ‘capturing’ nature, his recent pieces highlight nature itself capturing humans.
What meaning does nature have for humans? Is it merely a physical environment accepted as an object? Bak considers nature as an ideology itself dominating human consciousness. Humans are usually obsessed with the ideological value of nature. Human behavior is sensitive to land prices and thus, destroy the homes they lived throughout theirlives for financial gains so casually and consistently prove the belief of modern subjects flowing under human consciousness. Humans, the subjects of reason, never consider nature as their companion. Nature is, for them, an eternal slave that can never beequal to them. That is why nature is the one being captured by human consciousness. Whether nature is captured realistically or spiritually, the nature captured by the human subjects is a possession of consciousness. Arrogant people dig the ground and turn waterways for ‘captured nature’, their eternal possession. When will humans be able to stop the actions of selling and buying nature? Bak does not stop tacit acts, like penance, in the real natural environments. These are Bak’s artistic actions to dig the ground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nature and draw pictures on the streams and fields.

3. Capturing for life and emancipation
Let us again go back to the definition of ‘natural’. What is ‘natural’? Nature today is exposed to artificial environments and worlds where we cannot exist naturally. Bak sees that no nature is left untouched by human hands and desire, and nature is always an economical, political scapegoat. The purpose of his artistic, cultural action is to recover the original meaning of nature. It means he has to present a site where nature lives its own life as the subject of seasonal change, not an objectified physical nature. This is to be liberated from the dominance of human’s suppressive ideologies hidden behind human consciousness. This is to see a human being as life itself, escaping from material, capital, and economical value.
From which will we be liberated? Humans have consistently explored ways for emancipations for themselves and nature. What is waiting for us in the end of suchemancipation? Which way should we explore after being free? Liberation does not simply mean escape. This question is again about humans and nature. Liberation means asking about ‘being alive’ or ‘life’.
Bak narrates about the naturalness of life through his work. When he used the term ‘capturing’, it means capturing living beings. The Captured Nature thus means capturing nature with life. His exhaustive work (executed in the actual natural environment), toward nature captured by human’s subjective consciousness, comments on nature’s aliveness and its emancipation questioning human reasoning toward nature. “What is naturalness?” As mentioned above, any answer to this question is possible when ‘seeing nature as nature’. We can say nature is ‘natural’ when wesee nature as nature itself with life, nature dominated by human consciousness, and nature not trampled by the power of capital. We humans can also be humans when the term ‘humanistic’ sounds ‘natural’. Bak’s art is thus for humans, not only for nature.

시간을 읽는 사진, 인간을 읽는 시간-정일주(월간퍼블릭아트 편집장)(2013)

-정일주(월간퍼블릭아트 편집장)
눈길을 사로잡다. 비단 사진 뿐 아니라 작품을 설명할 때 쓰는 표현 중 가장 상급에 해당한다. 완벽히 연출된 화면이나 색감,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와 선명한 감각이 엿보일 때 쓰는 문장이다. 박형렬 작품의 첫인상은 스칸디나비아호수처럼 조금 차갑다. 단순한 화면과 절제된 디테일에서 약간의 긴장감도 느껴진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일단 모던한 사진에서 느껴지는 건조함과 어색함이 없다. 시간을 가지고 볼수록 적당히 인간적이며 유머러스하다. 그는 이번전을 위해 대단한 공력과시간을 투자했다. 수 많은 스텝과 장비를 동원했고 끝없는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누구보다 날카로운 자기검열을 겨우 통과된 작품만을 전시장에 내걸은 것이다.
타이틀이 설명하듯 박형렬의 사진엔 자연이 등장한다. 허나 그것은 맑고 푸르며 아름다운 것 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바닷가 모래를 블록으로 쌓아 층을 만들거나 회오리 모양의 원반으로 매우 이질적인 길을 내고, 집채만한 흙 공을 만들어 자연 공간에 침투시킨다. 등장인물들은 참을 수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것은 생산적이거나 자기주도적인 모습은 아니다. 이는 순전히, 완성될 장면을 간파한 작가의, 철저한 계산으로 연출된 자세 혹은 표정인 것이다. 작가 스스로 본인의 작품을 “비효율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반자본주의적” 이라 피력하듯 자연에 완성해 놓은 인공적 형태와 인물 모두 일견 덧없어 보이지만, 그것은 고스란히 조형성을 어필하고 서사성을 드러낸다. 작가는 완전히 독창적인 무대를 만들고 새로운 인물들을 포함시킴으로써 자기화된 화면을 완성하는 것이다. 작품 제작 과정은 이렇다. 우선 이야기를 짠다. 그리고 실행되는 그의 작업은 대지미술과 다르지 않다. 자연에 인공물을 덧대거나 덜어냄으로써 배경을 만들고, 앞서 설명했듯 그 속에 인물들을 배치한다. 그의 작품에서 인물은 결코 필수요소는 아니다. 다만 스토리를 더 풍성하게 만드는, 마치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과 같은 것이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감성을 자극하거나 샤프한 음성으로 다큐의 긴장감을 더하듯, 박형렬은 여자, 남자 혹은 어떤 성별로 구분되지 않는(혹은 구분할 필요 없는)인물을 띄엄띄엄 배치함으로써 작품의 강약을 조절한다. 이후 촬영에 돌입한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기후와 상황의 미세한 컨디션을 모두 감내하며 그는 사진을 찍고 화면으로 만들어 낸다.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늘 야박한 작가는, 쉽게 갈수 있는 모든 것을 지양하며 좀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방법들을 따른다. 이런 고집이 작품의 밀도를 높이고 창의력을 고취시키는 양분인 셈이다. 촬영 후 모든 설치는 파기되고, 자연은 원상 복구된다. 그가 ‘반물질적 작업’ 이라 설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연에 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슷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저마다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다르게 보여주려는 이들이 바로 작가다. 박형렬은 위트나 풍자야 말로 작가의 큰 무기임을 인식하고 분명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이제 도입을 지나 전개를 펼치는 작가의 단계 중간에 있다. 공교롭게, 최근 몇 차례 박형렬의 작품을 논의하는 공식적인 자리에 참여했다. 아쉬웠던 점은, 말끔하게 정돈된 화면만으론 작가가 치밀하게 구성한 프로세스와 처절한 노고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걸 간파하는 고수들도 없지 않았지만, 그저 트렌디한 ‘요즘사진’ 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눈길을 사로잡는데 성공하고도 그 안에 엉킨 서사를 전부 어필하지 않는 그의 사진은 앞으로 박형렬이 풀어야 할 숙제다.‘작업에 대한 효율성’ 이란 주제로 늘 자기분석하는 박형렬, 그때마다 원초적으로 내재된 무식함과 고집을 발동시켜 무던히땅을 파고 덮고 다듬는 그의 열정을 응원한다.

The captured nature statement(2013)

-박형렬

2010년부터 작업을 진행한 ‘The captured nature(포획된 자연)’은 자연에 대한 개인적인 애착에서 비롯되었으며, 현 사회 속에서 자연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에 관한 탐구과정을 담고 있다.

사회 속에서 관찰한 자연의 모습은 인간의 이용목적에 의해 이리저리 옮겨지거나 답답한 대리석 안에 갇히게 되는 등 아주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고, 여기에서 자연 그대로의 편안함은 느낄 수 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을 사냥꾼과 사냥감으로 설정하고, 인간들이 다양한 덫(장치)들을 이용해 자연을 사냥(포획)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러한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 ‘The captured nature’는 과연 자연은 인간의 마음대로 소유와 이용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작업의 초기에는 비닐봉지와 끈, 스티커와 천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소재를 활용해 다양한 포획의 방법과 형태를 연구했다. 최근에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활동이 내재된 숫자와 도형, 색의 대비와 이분법 등의 요소들을 은유적으로 차용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사유했던 중세 철학은 데카르트의 주체철학을 통해 근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이후에 흄과 칸트 등 근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이 신의 자리를 대신해 진리의 영역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검증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자연은 인간과 분리되어 인간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객체로써 인식되면서 이른바 기계론적 자연관이 성립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기계론적 자연관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야만적이고 잔인한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증명된 현시점에서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처럼 개인적으로 체험한 자연과 사회에 내재된 자연관을 견주며 품게 된 의문은 결과적으로 ‘자연을 포획한다’는 터무니없는 상황을 연출하는 작업으로 이미지화 되었다. 간혹 황당하고 어이없게 느껴질 수 있는 행위들을 재현하며 애초에 ‘자연’과 ‘포획’이라는 단어가 서로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 인간들에 의해 마치 사냥감처럼 생명을 위협받고 존재를 상실하는 자연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여기에 우리가 자연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모란미술관 'NATURE' 전시 인터뷰(2012)

-백곤(모란미술관 학예사)

1. 이번 야외미술프로젝트 展에서는 공공미술이나, 환경미술, 생태미술과는 조금 다른 지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체 전시기획은 리차드 롱의 “걷기”와 같은 자연이해와 체험에 목적을 두었는데요. 선생님의 작품은 자연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떤 목적으로 자연을 표현하고자 하시는지요?
- 작업의 시작은 오늘날 자연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욕망에 의해 아주 피곤하고 불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였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단순히 자연 체험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땅을 파거나 바위에 스티커를 부친다던 가 혹은 나무에 실을 묶는 등의 행위로 직접적인 개입을 하면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과연 우리 인간들이 자연을 소유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2. 선생님께서 모란미술관의 개활지 자연공간에서 작업을 하시면서 가장 중점을 두신 곳은 어떤 지점입니까? 어려운 점은 없으셨는지요? 다른 야외환경과 다른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이번 프로젝트는 관람객들의 직접적인 체험을 이끌어 내기 보다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열린 공간 속에서 다양하게 바라보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렇기 때문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넓은 공간 안에 양각으로 조각된 숫자들이 두드러지게 보일 수 있게 정확한 치수로 깔끔히 제단하고 최대한 깊이 팔 수 있게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땅을 파면 팔수록 흙보다는 돌이 많이 나와서 깊이 파는 것이 어려웠고 다른 개활지에서 볼 수 없는 콘크리트 덩어리도 많이 나왔던 것으로 미뤄볼 때, 땅을 평평하게 하기위해 실제 땅위에 인위적으로 흙과 돌을 덮은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3. 이번 전시를 준비하시면서 여름의 특성상 비,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비, 바람과 같은 자연현상이 선생님의 작품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요? 또한 작업을 하시면서 기상에 대한 부분을 고려하시는지요?
- 제 작업은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상환경에 매우 민감하게 움직입니다. 대부분 비가 오지 않는 날씨 중에 흐린 날과 맑은 날을 택해서 작업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이번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틀을 제외 하고 대부분 비가 왔고, 그러다 보니 설치도 완료하기 전에 땅을 판 곳에 물이 고이고 제단 된 곳이 뭉개지는 등의 상황들을 겪었습니다.

4. 모란미술관 야외미술프로젝트 "nature"는 자연-환경 이해에 초점을 맞춘 전시입니다. 선생님께서 평상시 작품 활동을 하시면서 “자연”을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 오늘날 자연은 자연스럽게 살아가기에는 어려운 세상 속에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인간들의 손과 욕망이 닿지 않는 곳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인 혹은 정치적인 희생양은 항상 자연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5. 자연과 문화(예술작품)는 서로 대립되는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이 문화적 행위라고 했을 때, 대자연의 환경 속에 작품을 가져다 놓았다고 했을 때(혹은 설치되었다고 했을 때) 작품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진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제 작업은 자연환경 속에서 설치되고 사진으로 기록된 이후에는 사라지며, 후에 사진으로 관객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은 소유될 수 있는 문제의 것인가를 반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보면 제가 하는 문화적 행위는 자연과 대립된 성질의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자연 속에 순응하기 위한 일종의 해프닝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자연환경의 특성상 작품파손의 염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야외미술 전시를 하시면서 작품이 파손된다면 어떻게 하실 것인지요? 작품파손도 야외미술 전시의 일환으로 생각하시는지요? 아니면 언제나 처음의 작품과 같이 복구가 되는 것이 중요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 제 작업은 다른 설치물 없이 땅을 음, 양각으로 표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자연현상 속에서 그 틀이 무너지고 더해지는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숫자들의 형태가 점점 사라지게 되는 현상은 소유의 문제와도 연관지여지기 때문에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7. 이번 야외미술프로젝트 “nature'에 참여하신 소감과 관객들이 선생님의 작품을 어떻게 감상하면 좋을지 감상의 포인트를 말씀해 주십시오.
- 땅으로 형성된 돌과 흙은 아주 조금의 양도 들어올리기가 쉽지 않음을 직접적으로 느끼면서 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 무모한 존재인지를 다시한번 느꼈습니다. 이번 작업을 체험하는 관객들은 땅 안에서 1평으로 구조화된 0~9까지의 개별 땅들을 보면서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는 이 1평짜리 땅을 어떻게 느끼며, 한국 사회에서 1평이라는 가치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8. 선생님께서는 자연을 ‘포획한다’라는 개념으로 작업을 하십니다. 정확히 무엇을 포획한다는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 포획이라는 말은 원래 생명이 있는 것을 사로잡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이라는 것이 단순한 도구가 아닌 생명이 있는 존재임을 이야기 하며, 생명이 있는 것을 포획한다는 것이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님을 이야기 합니다.

9. 이번 작품이 땅의 3.3m²(1평)에 대한 작업인데, 자세히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지요?
- 한국사회에서 땅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은 평당 얼마냐 하는 것입니다. 즉 1평에 따라서 각각 땅의 가치도 달라지게 되고 그에 해당하는 인간의 욕망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숫자라는 것은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것을 떠나 도시화 시키는 한 방법으로 대상을 체계화, 구조화 시키는 도구로 쓰였으며, 현대인들에겐 많고 적음 , 크고 작음의 상대적인 척도를 판단하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의 개념을 가지고 모두 1평으로 동일한 면적의 0~9까지의 개별 땅들을 만들어 보여주고, 땅에 부여된 각기 다른 크기를 가진 총 10개의 숫자들이 실질적으로 모두 1평 짜리로 동일한 크기임을 이야기함으로써, 땅에 대해 가치를 논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행위 인가를 묻고자 합니다.

10. 선생님의 작품은 실제 자연환경의 땅을 파서 작업을 하셨는데 땅을 파는 것 이외에 이번 작품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앞으로도 땅을 파는 작업을 하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 작업을 진행하면서 한 가지의 방법이 아닌 매번 다른 방법들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다른 식으로 땅을 파게 되면 모를까, 비슷한 형태의 작업으로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를 다른 식으로 표현해 본다면, 동일한 흙의 양으로 크기가 다른 덩어리들을 만들어 땅위에 놓이게 하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크기가 커지는 덩어리들은 속빈 강정들이 되겠죠.
감각적으로 변주하는 스토리텔링(2012)

-이혜린(월간퍼블릭아트 기자)

다음 물음에 답해보자. 베르사유 궁의 정원은 자연인가, 아닌가?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분재를 자연으로 보는 이에겐 긍정이겠지만,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는 상태’라는 사전적 의미와 비교한다면 그것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과 인공의 기준이 분명치 않은 간극에서 우리는 아파트 단지 내에 정돈된 뜰을, 도심 속에 위치한 공원을 두고 자연이라 부르며 살아간다. 우리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때로는 의도적으로 기준과 취향에 맞게 자연을 훼손하고 정렬하고, 옮기며 폭력을 휘두른다. 이런 현대인의 행태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박형렬은 “인간은 자연을 소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곤 동시대에 녹아든, 천연덕스러운 현대인의 속성에 착안해 작업을 진행한다.

자연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아니, 정정한다. 자연이 있었기에 인간은 존재할 수 있었다. 명백한 진리임에도 쉽게 잊는 사실이다. 자연이란 주객은 전도된 지 오래다. 우리는 이를 소유물로, 편의와 취향에 따라 이용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볼 뿐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자연을 스스로 성장과 발생을 거듭하는 하나의 생명체로 파악하는 유기적 자연과는 대조적으로 자연의 운동과 변화를 기계적 인과관계로 파악한다는 기계론적 자연관의 결과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자연관에 대한 정당화는 자연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를 불러왔고, 그것에서 시작한 현상의 복합성을 무시함으로써 자연의 본래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문제까지 일으켰다. 이에 대한 의문이 확산하였고, 현대화가 진행할수록 반대 여론과 반발은 더욱 커지고 있다.
박형렬 역시 최근작 를 통해 ‘인간의 자연 포획’을 시각화하며, ‘자연은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연히 사회 안에 위치한 풀과 나무, 바다, 바위 등 자연이라 불리는 것들이 편안함을 유지할 수 없음을 알아차렸고, 이것이 작업의 단초가 되었다. 자연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그의 애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되는 자연의 의미에 애착을 갖게 했고, 작업을 통해 인간의 이기를 알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자연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채우고, 이를 당연시하는 현대인들의 일상을 고발하는데, 이때 선보이는 이미지들은 인위적이지만 억지스럽지 않고, 진지하지만 결코 무겁지 않다. 오히려 풍자를 겸비한 위트와 해학에 가까운 작가만의 상상력이 드러난다. 가령, ‘소유’를 시각화하고자 바위에 붉은 스티커를 붙이거나, 플라스틱 박스에 담긴 나무를 이리저리 옮기거나, 바닥에 기둥을 세우거나, 강에 놓인 자갈에 번호를 매기거나, 가느다란 색실로 대지를 나누는 식이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사진이란 매체에 작가의 철학과 독창성을 결합하고, 그 위에 작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재창조된다. 이는 재현의 매체인, 순간을 기록하고, 보존하려는 열망에서 탄생한 사진의 특성을 한 단계 넘어선 일이다. 단순한 보존이란 사진의 의미를 넘어 주관적인 시선을 개입할 때, 오롯한 작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매체로서 전이되는 힘을 믿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작업인 시리즈와 연작에서도 이어져 온 특징이다. 전자는 다양한 직업군을 찾아가 그들이 일하는 장소에서 인물과 이들의 행동 양식 변화를 사진으로 남긴 것이고, 후자는 어느 순간 급속도로 유행이 된 ‘웰빙’에 대한 이슈를 포착한 것이다. 모든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작가의 주관적인 시도가 엿보이지만, 최근작에 비해서는 자유롭지 못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무거운 메시지를 그만큼의 무게로 전달하고자 한 작가의 강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점차 이러한 압박에서 벗어난 작가는 화면에서 재미를 시도하기 시작하면서, 작가의 최근작은 자신의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세련된 해석을 내놓기에 이른다.
박형렬이 다루는 소재(주변인, 한순간의 유행, 자연)는 ‘자신이 직면하고 접하는 일상’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나를 포함한 평범한 인물이나 주제군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모두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를 이끌어낸다.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유쾌한 제스처로 사회적인 이슈를 상기시키기에 각각의 시리즈는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면서도 공통의 연결고리를 갖는다. 작가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당연히 여기는 것’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담아낸다.

The captured nature statement(2011)

-박형렬

드라마 속 비극의 주인공처럼 모든 불행이 마치 내 것인 것처럼 행동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난 하루가 멀다고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마음 닿는 곳에 발을 디뎠다. 마치 두서없는 글처럼.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에 난 내 발이 숲 속을 지나 산 정상을 내딛고 있었음을 보게 되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산책이다. 자연에 내보이는 관심과 강박적인 집착은 어쩌면 위안을 받고 있다고 느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내 시선은 자연스레 사회 안에서 바라보게 되었고 그 안에서 풀과 나무, 바다, 바위 같은 자연이라 불리는 하나하나의 것들이 내가 있는 이곳에선 온전한 편안함을 유지할 수 없음을 볼 수 있었다. 자연이 자연으로서 우리 곁에 있기에는 불가능한 것인가.? 불행하게도 나조차도 욕망의 그늘에 산다. 성공하고 싶은 욕망, 갖고 싶은 욕망, 빼앗고 싶은 욕망 등 수많은 욕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살고 있다. 더욱이 이런 욕망을 부추기는 이곳에선 아주 조금의 틈만 보이면 이리저리 휘젓고 들어와 회색으로 물들인다. 자연은 그 회색 빛깔에 따라 옮겨지기도 하고 끌려가기도 하고 무엇으로 탈바꿈되기도 하면서 아주 피곤한 자신의 삶을 살 뿐이다. 생각해 보건대, 우린 단 한 번도 자연에게 당신 생각을 물어본 적이 없다. 그래도 되는지를.

이런 시각으로 진행되는 ‘The captured nature' 작업은 자연을 포획하고 이용하기 위한 여러 다양한 장치들과 그 안에서 행위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해 나감으로써, 오늘날 현대인들과 자연의 이기적이고 지배적인 관계에 대해 의심해보고자 한다. 또한, 과연 자연이란 것이 우리 인간들에 의해 소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Hyongryol Bak

Once I felt so unhappy, like a protagonist in a tragedy. I traveled places, wherever my mind roamed, daily by train or bus. After a time I was on top of a mountain after passing through a forest. A walk is now what I like most. My concern with and obsession for nature probably began at the moment I felt I was consoled by nature.

My gaze remains confined to society. I realize each element of nature such as plants, trees, rocks, and the sea cannot be in comfort within society. Isn’t it possible for nature to be with us as nature itself? Unhappily I have always been in the shade of desire. I cannot give up desire for success, desire for possessions, desire for plundering. Nature is tinged with gray where such desire exists. Nature lives a tired life, moving, led, and turned by the gray. We have never asked nature what it thinks and if it is alright.

Reflecting this view, Captured nature questions contemporary people’s dominant, selfish connections with nature by recording devices that capture and exploit nature and those involved. I seriously wonder if nature can be possessed by humans.

박형렬의 "포획된 자연"을 소개하며 / Introducing 'Captured Nature' by Hyongryol Bak(2011)

-존 고토(영국더비대학교 교수)

"자연을 포획하는 것”(to capture nature)은 사진에서 흔히 사용되는 상투적인 말인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The camera never lies)라는 표현과 동일하다. 이 두 표현은 사진의 특질인 모방에 근거해 세계와 사진적 과정 사이의 특수한 관계(a privileged relationship)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헨리 폭스 탈보트의 상업적으로 출판된 최초의 사진집인 “자연의 연필”(1846)(The Pencil of Nature)에 묘사되어 있다.

자연을 포획한다는 것은 박형렬이 그의 풍자적인 사진에서 보여주듯 터무니없는 제안(an absurd proposition)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리함은 인간과 자연 중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 박형렬은 인간의 자만심이 바로 그 범인(the culprit)이라고 단정짓는다. 그는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멀어졌으며 이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음을 암시한다.

해변의 왕좌에 앉아 밀려드는 파도에 물러가라고 명령했던 크누트 대왕(995-1035) (great king Cnut)의 이야기가 영국에 전해진다. 바다는 그의 명령에 무관심했으며 왕은 물에 젖고 말았다! 지혜로운 왕의 몸짓은 자연이나 신에 비해 자신의 권력은 지극히 제한적인 것임을 아첨을 일삼는 신하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포획한다는 것은 (사냥감에) 물래 접근하기, (사냥감) 뒤쫓기, 그리고 (사냥감을 향해 총) 발사하기 등과 같이 사진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사냥의 은유(hunting metaphor)이다. 박형렬 공연단(troupe)의 멋진 사냥꾼(stylish hunters)들은 서로 합심해서 사냥감을 추적하고 철저히 침묵을 유지하며 즉흥적으로 고안한 덫을 주의 깊게 설치한다. 자연은 그들에게 하나의 상품이고 그들은 종종 주차장으로 자신들이 구입한 물품들을 힘들게 끌고 가는 프레임을 벗어난(out-of-frame) 쇼핑몰의 쇼핑객처럼 보인다. 쇼핑처럼 그는 자연에 대한 약탈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연중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의 사진들은 조화로운 공간을 보여준다. 풍경 속에 놓인 인물, 이미지의 틀, 제시되는 작품의 규모 등 여러 요소들은 자연 자체를 통제하기 보단 이미지에 대한 주의 깊은 통제로부터 비롯된 미적 질서(an aesthetic order)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는 박형렬의 일련의 우아한 작품들(elegant series)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이기도 하다. 이는 자연에 대한 존경이며 인간의 특별한 재능을 고취하는 것이다.

-John Goto (Professor, Derby of University, U.K)

To ‘capture nature’ is a photographic cliché on a par with ‘the camera never lies’. They both share a belief in a privileged relationship between the world and the photographic process, based on photography’s mimetic qualities. Indeed, such a relationship was announced in the title of Henry Fox Talbot’s ‘The Pencil of Nature’ (1846), which was the first photographically illustrated book to be commercially published.

To ‘capture nature’ is an absurd proposition as Hyongryol Bak demonstrates in his satirical tableaux. But where does the absurdity lie, with us or with nature? Hyongryol Bak suggests human hubris is the culprit. He suggests that we have become ever more removed from nature, and hints at consequences that may yet prove momentous for humankind.

In Britain we have a story about the great Norse king Cnut (995–1035), who sitting on his throne by the seashore, ordered the incoming tide to turn back. The sea was indifferent to his command and he was soaked! The wise king’s gesture was to show his obsequious courtier the limits of his power in the face of nature and God.

To ‘capture’ is a hunting metaphor frequently used by photographers alongside ‘stalking’, ‘tracking’ and ‘shooting’. Hyongryol Bak’s troupe of stylish hunters work in unison to stalk their prey, carefully setting improvised traps whilst maintaining complete silence. Nature has for them become a commodity and they often look like shoppers hauling their purchases towards an out-of-frame mall car park. Like shopping, he suggests, plundering nature is an all-year-round activity, come snow or shine.

And yet these are not pictures without space and harmony. The placement of figures in the landscape, the framing of the image, the scale of presentation all suggest an aesthetic order derived from the careful control of the image rather than an attempt to control nature itself. And maybe this is one of the lessons we can draw from Hyongryol Bak’s elegant series – respect that which belongs to nature, and encourage in humankind its own special talents. Otherwise, we are likely to get wet feet!

박형렬의 사진, 뷰파인더를 통해 사진의 또 다른 길을 찾기 / Bak Hyong-ryol’s Photography, Finding a New Method of Photography through the Viewfinder(2011)

- 박정구(스페이스씨 큐레이터)

사진이 생겨난 이후 “회화는 죽었다.”고들 했지만 여전히 건재하다. 회화를 닮고자 했던 사진도 그 매체적 특성으로 예술의 지위를 획득한 지 오래다. 그러한 점에서 사진이 회화를, 회화가 사진을 닮으려는 존재의 문제를 건 경쟁은 이미 많은 부분 그 의미를 잃었다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사진과 회화는 지금도 서로가 지니지 못한 상대의 고유한 특성을 수용함으로써 스스로의 영역과 예술적 표현의 가능성을 넓히기에 애를 쓰고 있다.

생각해볼 때, 그렇게 한 쪽이 가지지 못한 것을 상대로부터 빌려오는 방식이 있다면, 스스로 지닌 배타적 특성을 십분 발휘함으로써 차별성과 효율성을 발휘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두 방법 사이의 길항이 바로 사진 탄생 이후 회화와 사진이 각기 걸어온 길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통상적으로 예술이 걸어온 내적이고 자발적인 전개의 여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라 할 것이다.

박형렬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회화나 설치 등 여타 장르의 것으로 여겨지던 속성들을 끌어들여 기록성과 같은 사진매체의 근본적 특성을 벗어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지극히 짧은 시간에 포착된 이미지라는 사진이 지닌 배타적 특성의 장 속에 회화나 그 밖의 장르가 지닌 특장을 끌어들임으로써, 현장의 기록으로서의 사진보다 회화와 같은 주제가 부여되고 (서사적)장면이 재현된 사진을 추구한다.

그의 사진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우선 ‘연출사진’이다. 근래에 그는 무심하게 이루어지는 ‘인간의 자연 사용’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다. ‘자연 사용’은 자연 파괴나 환경 파괴 같은 말로 이야기하면 분명할 것을 에두르는 것이 아니라, 그에 덧붙여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자연 활용을 포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자연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이익 획득 행위를 말한다 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자연풍경 속에서 자연물을 획득하고 있는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연출된 모습’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

사진을 위해 그는 주제에 적합한 자연 속 공간을 찾는다.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다. 주제와 촬영에 적합한 공간이 결정되면, 그 공간과 지형에 맞추어 연출될 장면에 필요한 소품들을 마련하고 참여할 인원을 구한다. 촬영을 위해서는 이리저리 소품들을 설치해보고 인원들을 배치하는 긴 준비와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곤 비로소 촬영에 들어가는 것이다.
정물화를 그리기 위해 테이블 위에 꽃이나 과일 등을 배치하는 것조차도 거의 동일한 과정의 연출임을 생각할 때, 위와 같은 과정은 연출이라는 방식이 개입되는 경우라면 큰 차이는 없는 절차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박형렬의 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는 큰 차이점은, 주제와 효과의 극대화, 시각적 충격을 위해서 극적인 상황 속에 있는 현장을 찾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산림이 훼손된 벌목 현장이나 파헤쳐진 하천을 찾아 나무와 물의 훼손, 또는 생태의 파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연을 획득하고 유린하는 사람들과 무덤덤하게 자신을 내어주는 자연이 존재한다.

그의 사진에서 사람들은 작가에 의해 고안된 도구나 장비로 나무를, 바람을, 물을, 바위를 포획하고 있다. 일면 야외에서 벌어진 퍼포먼스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는 화면에는, 설정이 존재하며 그에 의해 배치된 인물과 소품이 존재하고 구도와 색채가 존재한다. 그렇게 설정되고 연출된 행위의 스틸 컷이다. 그래서, 설치가 장소적 제약에 따른 일회적 속성을 지닌 것이며, 퍼포먼스 또한 기록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시간의 제약을 갖지만, 그의 사진에서 다양한 행위를 보여주는 사람들과 거기에 놓인 소품들은 마치 회화의 등장인물이나 배경의 물건들처럼 작품을 구성하는 주체로서 작품과 함께 하는 지속적인 생명력을 얻는 것이다.

그의 사진은 연출된 등장인물들의 포즈와 극적으로 강조된 빛으로 알려진 카라바치오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그림이 연출된 자세와 빛으로 극적인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현실감과 보는 이의 임장감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면, 박형렬의 사진은 연출된 장면의 스틸컷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그 공간과 등장인물,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 대해 상상하고 추측하며 나아가 사고하는 여지를 제공하고자 한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사유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방식을 “풀과 나무, 바다, 바위 같은 자연이라 불리는 하나하나의 것들이 내가 있는 이곳에선 온전한 편안함을 유지할 수 없음”에 대해 자신의 작품을 통해 반성적 태도를 가져보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필요에 의해 무단히 맺어지는 자연과의 관계를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현장고발과 같은 충격적이거나 극단적인 노출에 의한 참여적 태도가 아닌, 그 한 부분에 불과한 인간이 행하는 자연의 무분별한 유린을 드러낸다. 그러한 점에서, 보는 이를 향한 그의 태도는 노골적이지도 않으며, 자신의 해답 내려 강요하는 방식 또한 아니다. 다만, 그의 사진이 보는 이 각자가 그러한 문제에 대해 돌아보고 자신의 답을 내리는 유연한 하나의 장으로서 역할하기를 기대한다.

단 한 컷의 사진을 위해(비록 그가 택한 일이기는 하지만), 각지를 돌아다니며 장소를 찾고, 소품을 제작하여 설치하고, 등장인물을 등장시키는 그의 작업과정은 몹시 비효율적인 것이라고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작업과정을 통해 우리가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사진의 숨겨진 땅과 그 땅을 통해 여타 장르와 소통하는 길을 조금씩 찾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진이 기성의 영역을 넘어 조형적으로 발언의 장을 확장해가는 것은, 21세기를 맞은 오늘, 사진 내적으로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사진 외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그것은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Park jung-ku(Curator of Space Ssee)

After the birth of photography, it was said “Painting is dead.”, yet it still flourishes. Photography trying to resemble painting obtained the status of art long ago. Photography has tried to resemble painting, and vice versa. Any competition between painting and photography has been meaningless. The two genres have strived to broaden each sphere and the possibilities of artistic expression by embracing the other’s unique qualities. One genre may borrow things it does not have from the others, or it may become distinctive by fully exploiting its exclusive traits. After the birth of photography, the two genres took their own paths, competing and collaborating with each other. This can also be called the internal, spontaneous journey of art.

Bak Hyong-ryol attempts to escape from the fundamental traits of photography by embracing attributes of other genres such as painting and installation. He lends painterly qualities to his photographs by introducing the features of other fields like painting to the arena of exclusive photographic qualities, pursuing photographs representing narrative scenes.

In short his works are staged photographs. Bak recently started working with the theme of human ‘exploitation of nature’. This expression, ‘the exploitation of nature by humans’ is equivalent to the destruction of nature and the environment, but refers to the one-sided use of nature by humans. That is, this means we use nature for our own interests without considering the intentions of nature. Bak’s photographs are thus directed scenes featuring people acquiring natural objects in landscapes.
He looks for a proper natural space for his photographs, which requires a great deal of time and effort. After deciding on the theme he looks for a suitable space, he prepares the props necessary for his scenes and then looks for persons to serve as models. A lot of time and patience is needed to set the props and arrange his models. Once ready, Bak begins photographing. His process is similar to arranging flowers and fruits on a table for a still-life painting. Bak’s photographs do not involve any dramatic situation to maximize thematic effects or visual shocks. His works simply captures those exploiting and devastating nature for their interests and desires, and nature offering itself, without showcasing damaged forests and rivers or ecological destruction explicitly.

In his photographs people capture trees, wind, water, and rocks with devices and tools the artist invented. The situations in his photographs look like scenes form a performance. Each scene is set up by the artist, as he arranges the figures and props, and conceives the composition and colors. Although an installation has a one-off quality and is limited by space, and a performance is confined to time, the people and props in his works have a continuous life force, like the figures and objects in a painting.

Bak’s photographs are reminiscent of Michelangelo da Caravaggio’s paintings known for the figures’ directed poses and dramatically emphasized light. While Caravaggio’s paintings maximize a sense of reality and immediacy by capturing a dramatic moment with directed postures and light, Bak’s photographs are intended to offer room for viewers to imagine, guess, and meditate on his photographic space, figures, and their actions. This is contemplation on the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nature.

Bak says his way is to have a reflective attitude through his work. “Each natural object such as grass, trees, sea, and rocks cannot be in comfort in my place”. This means he looks back on a relationship with nature made by necessity. He reveals the reckless destruction of nature by humans not in a participatory attitude but through shocking, extreme accusation and exposure. In this sense his attitude toward viewers is neither explicit nor coercive.

Bak simply hopes his photography can assume the role of a forum where each viewer reflects on such a problem and arrives at their own answer. His process of travelling to many places, looking for proper space, making and setting props, and selecting characters for a piece of work is very ineffective, even though he has chosen the work for himself. Through this process however, he discovers a new territory of photography and ways for communication with other genres. This extension of photography in the 21st century is internally meaningful, and externally significant for photography itself.
우리는 왜 자연을 이야기하는가? / Why is this about nature?(2011)

- 김숙경/ 전시기획

한국의 자연관
“자연”은 한국의 정신과 생활문화 기반에 깊숙이 자리한 총체적 개념이다. 이는 자연의 생태학적 원리와 이치가 인간의 삶과 근원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자연은 인간이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닌 세계의 윤리를 지시하는 범-철학적, 문화적 성격을 갖는다. 자연의 구조와 생명력은 인간을 훈육(訓育)하는 지표로서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의 규범인 것이다. 중국의 현대미학자 장파(張法)는 자연을 “끈임 없이 변화하며 동시에 변화하는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생명의 영혼과 힘을 지닌 자연은 사물을 생성하며, 생멸과 순환의 법칙을 만들어 낸다. 하나의 사물은 치유와 자생력을 가지며, 새로운 생명의 본원으로 다시 이어진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이러한- 시간 속에 존재하며 인간 역시 그러하다.”라는 논지를 통해 세계를 지지하는 생명적 에너지의 근원이 자연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장파의 견해에서 주지할 점은 자연개념이 철학과 종교의 형이상학적 범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방식과 문화유형을 포괄하는 인간의 구체적 현실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중국, 한국, 일본 및 아시아 전역의 자연주의는 첨단의 과학기술과 상업자본주의가 삶의 형식을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도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관념적 특성을 지닌다.

자연과의 조화(調和)와 삶의 치유
일반적으로 서양의 예술론이 모방, 상상, 직관을 핵심으로 하는 세 가지의 상이한 창작과정을 통해 발전하였다면 동양은 ‘자연의 조화를 본받는다’는 보편적 원칙 아래 그 조화를 표현해내는 창작론으로 일괄한다. 서로 잘 어우러진다는 조화의 뜻은 예술관에 이르러 ‘다른 것들마저도 용납한다’는 포용의 강한 의미로 심화된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화해관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표현방식의 차이를 보이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여 예술가의 사고와 미적 판단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음악, 문학, 미술과 같은 예술의 고전적 장르뿐 만아니라 매체 혹은 다원예술 등 토탈 아트의 영역에서도 자연은 동서의 예술관을 구분하는 문화적 개념인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교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번 전시는 자연에 관한 예술가들의 다양한 해석을 관찰한다. 7인의 프랑스작가와 회화와 사진, 설치와 미디어 분야에서 10명의 한국작가가 그들의 세계가 지닌 자연관을 보여준다.
총체적 자연주의가 본질적 특성인 한국의 전통미술에서 회화는 그 무엇보다도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전제로 한다. 이는 경치를 표현함에 있어 사실적 묘사가 아닌 관찰을 통한 심상을 그리는 것으로, 한국의 산수화는 미술문화의 전통과 현대를 포괄하는 중요한 장르 중의 하나이다. 먹을 주재료로 작업하는 조인호는 한국의 실재 자연풍경을 그린다. 여러 시점에서 대상을 관찰하는 산수화의 이동시점방식은 그의 화면에 이르러 극적인 역동성을 형성하고 자연의 초월적 시간개념을 강한 시각적 에너지로 치환한다. 그의 그림에서 산은 ‘움직이는’ 실체이며, 자연은 살아 있다. 이와 같은 자연의 생명성은 강부언의 회화에서 삶의 일상을 구현하는 정신적 개념으로 작용한다. 그는 제주도의 자연경관에서 느끼고 반응하는 것을 수묵화를 통해 표현한다. 그의 회화는 자연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맑은 기운’을 형상화하려는 작업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연의 진솔함과 ‘건강한 현장성’이 간결하면서 힘 있는 수묵의 이미지로 가시화된다.
한국 전통회화의 본질과 아울러 “자연”은 현대미술에서도 많은 예술가의 개성과 미적 태도를 형성하는 초석이 된다. 정치와 자본의 메커니즘이 산출한 허위적 현실과 부조리에 종속된 현대인의 삶과 이에 따른 문제의식은 오늘날 예술가들이 묻는 중요한 주제이다. 신세대 작가 빈우혁, 정호상, 설기효는 인간내면에 존재하는 사고의 원형을 자연에서 찾는다. 빈우혁과 정호상은 권력의 지배논리 아래 현대사회의 인간관계가 산출하는 사건과 감정의 충돌을 자연의 장소 혹은 자연적 이치에 대입, 그 안에서 삶이 지닌 소외와 모순을 해갈한다. 그들의 회화에서 보여지는 자연적 풍경은 소재로서의 대상이 아닌 사고의 정신작용이 이루어지는 비가시적 추상공간의 의미를 띤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화해관을 통한 삶의 치유방식은 사람의 맥박을 한국전통음악의 5음계로 변환한 설기효의 소리-설치작업에서 작가 개인의 구체적 표현형식으로 전환된다.
인간의 욕망과 현대사회의 속성을 사고함에 있어 김남수와 박형렬은 사진을 매개로 그 역사적 현실과 삶의 주체로서 인간의 가치관을 이야기한다. 자연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행위와 이 과정을 기록한 박형렬의 작업은 인간이 자연과 조우하여 교감하는 것으로, 행위에서 오는 놀이적 성격은 자연을 일상의 범주로 가져오는 유연성을 보인다. 의사전달에 있어 사진매체가 갖는 현실성은 한국의 지석묘인 고인돌과 대도시풍경을 병치시킨 김남수의 작업에서 자연과 문명의 경계에 놓인 인간의 역사를 극적 상황으로 드러낸다. 자연에 회귀하는 인간의 삶과 사회집단의 주체로서 인간이 만들어낸 도시문명의 실체를 이미지와 빛의 강한 대비를 통해 구체화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예술가들이 주목하는 자연과 문명의 상생관계에 관한 해석은 김주연, 김순임, 차기율의 자연주의적 설치미술이 지닌 미적 개념과 성격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자연의 생명력과 순환원리를 근간으로 하는 그들의 세계관은 생태학적, 생물학적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구체적 작업방식을 전제로 개별적 특성을 이룬다. 인간의 기억과 회상을 반추하는 선험적 공간으로서 자연의 장소를 선택한 김순임의 작업과 이질적 공간 안에서 식물을 배양하여 문명화된 삶과 인간의 존재성을 질문하는 김주연의 설치, 자연에서 채집된 사물들이 작가의 자의적 조형언어를 통해 재창조되는 차기율의 작업은 현대문명사회에 필요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의식(意識)이 자연적 원리가 상징하는 화해관에 닿아 있음을 피력하는 것으로, 이는 작가 개인의 심미관과 더불어 자연과 문명의 융화가 예술의 제도적, 문화적 현실영역을 확장해 나간다는 예술가의 대사회적 접근태도와 미래지향적 실천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연”은 자본과 정치권력이 산출한 물질문화에 관한 인간의 사고를 부정이 아닌 삶의 모든 대립과 이질적 현상으로부터 정제된 의식의 차원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 Kim, Sook-Kyung is a curator of Kunstdoc gallery

A Korean way of viewing nature
‘Nature’ is a fundamental concept that is deeply entrenched within the essence and spirit of Korean life and culture. As a space for ecology as well as a way of thinking about human life and its primary relationships – rather than being simply viewed as an object for preservation – nature has significance in the philosophical and culture perspectives that shape our moral relationship with the world. Regardless of the limits of time and space, the structure and vitality of nature is an effective norm as a reference point for human discipline. Zhang Fa, a contemporary art aesthete from China has referred to the way that nature is constantly and endlessly changing, and yet at the same time, despite these ceaseless shifting conditions, it remains steadfast. Possessing the spirit and forces of life, nature generates creatures with its own rule of life, death and rebirth. In the wild a creature has the powers to heal and the ability to reproduce, before eventually returning to its role as the raw materials for another creature’s new life. Through the simple idea that humans and all other living creatures are part of this cycle of life, it can be argued that nature is the origin of all of the life force that supports this world. Fa’s ideas need to be carefully considered, as while they might seem somewhat abstract, this concept of nature is not solely restricted to philosophy, religion and other such metaphysical discourse; the ideas also relate to the practical realities of human existence, encompassing the quotidian and the cultural aspects of our lives. Throughout Asia – including Korea, China and Japan – naturalism is crucial to creating identity, even within a modern society where state-of-the-art scientific techniques, commerce and capitalism hold so much power of how we lead our lives.

Harmony with nature and healing in life
While Western art theory has been developed through three distinct phases of creation (imitation, imagination, and intuition) Eastern art theory is chiefly concerned with the expression of harmony, with the guiding principle being to ‘follow the harmony found in nature’. The significance within harmony of ‘getting along with one another’ becomes intensified, reaching the more profound level of ‘embracing the other’. The tendency towards naturalistic harmony can be seen to take different shapes depending on the specific time and period, but it is clear that it has played a key role as mediator, both in the past and in the present, when it comes to the different ideas and aesthetics being used by artists. As a cultural notion, our approach to nature can be distinguished between Eastern and Western perspectives on art, not just in classical genres such as music, literature, and visual art, but also within the realm of the ‘total work of art’ (Gesamtkunstwerk), in multimedia or cross-disciplinary art. As a cultural exchange between Korea and France, a variety of interpretations of nature are presented by the artists in this exhibition. Using a range of media – including painting, photography, installation and new media work – seven French artists and ten Korean artists present their personal perspectives of nature.
As one of the genres within Korean traditional art that has the overarching concept of naturalism at its heart, painting is based around the way that an artist perceives nature. Rather than realistic depictions of nature, the focus is on observations that represent an ‘inner landscape’, an image of the artist’s physiological and emotional relationship with a natural setting. Korean landscape painting is one of the most significant genres encompassing the traditional and modern ideas in visual art. Cho, Inho’s approach is based around actual landscapes in the Korean natural environment, working primarily with Korean ink. Cho’s work is developed using a particular method that involves presenting mountains and rivers from multiple points of view, resulting in extreme qualities of dynamism, and replacing a transcendental notion of time notion with an intense visual energy. In Cho’s work mountains appear as nothing short of ‘mobile’ entities, reflecting living nature. In Kang, Boo un’s paintings the vital energy of nature operates as a mental construct that embodies the quotidian qualities of life. Kang uses ink-and-wash painting to evoke the feelings he encountered within the natural landscapes of Jeju Island, an island to the south of the Korean peninsula. Kang’s paintings arise his intention to represent the tranquil energy that he found in his encounters with the natural environment. This energy is visualized through powerful images made of ink-and-wash, made with an economy of language that reflects the natural innocence and healthy energy found within each site.
As a crucial component at the essence of Korean traditional painting, nature acts as a touchstone for a number of contemporary artists seeking to develop personal styles and their own aesthetic attitude. Among the most significant concerns for artists today are issues related to a contemporary life defined by an absurd and deceptive reality that has been generated by the political and capital mechanisms that surround us. Emerging artists such as Bin, U-Hyeok, Jeong ho-sang and Shir, Ghyo seek to find within nature the essential forms of thought that reflect the inner landscapes of the human psyche. Examining the conflicts found in human relationships and the dominant logics of power, and then connecting them to natural sites or natural logic and causality, Bin and Jeong explore ways of viewing the alienation and contradictions that are part of our lives, Rather than simply approaching it as a subject matter, the natural landscape found in their paintings takes the significance of the invisible abstract space where cognition takes place. There can be a therapeutic quality to our experiences of nature, bringing a balance back to our lives. This idea takes a significant place within Shir’s sound-installation work, where human pulses are converted into the five notes that define Korean traditional music.
Using the medium of photography, Kim, Nam Soo and Bak, Hyoungryol address the values that human’s find within their lives and their historical constructs, considering human desire and the qualities that are inherent within modern society. Documenting a series of performances carried out in natural sites, Bak uses the engaging qualities of live art to demonstrate the fluid ways in which nature enters the everyday, and the ways in which he has developed an understanding with his surroundings when he encounters nature. In Kim’s work we see dolmen – the traditional Korean structure for a tomb – juxtaposed with metropolitan cityscapes, and here photography’s illusions of realism create a dramatic heightening of human history’s precarious balance between the natural and the man-made. It could be said that the strong contrast between images and light herald humanity’s fate to return to nature, as well as the truths of an urban civilization built by society’s subjects.
The aesthetic concepts and qualities found in Kim, Juyon, Kim, Soonim, and Cha, Ki-Youl’s naturalistic installations clearly reflect the tendencies for Korean and other Eastern artists to interpret the reciprocal relationship between nature and civilization. Their views of the world, based around nature’s vital energy and the cycle of life, each have distinctively different aesthetic qualities, yet in ecological and organic terms, none of them go against nature. Kim, Soonim selects sites in nature as experiential spaces to reflect on our memories and recall times gone by; in Kim, Juyon’s installations plants are cultivated in somewhat unexpected spaces to draw attention to civilized ways of life and the significance of human existence; while Cha‘s work is suggestive of how an artist might turn objects gathered from nature into a visual languages of their own. The works of these artists draw our attention to their perspectives on society and their abilities to look to the future, dedicated as they are to expanding the boundaries of the art institution and its cultural sphere. Simply put, their works suggest that, even in our modern civilized society, the genuine beliefs among everyday people are in unison with the notions of harmony inherent in nature. Nature serves as a tool that helps us become aware of the conflicts in our lives, to reflect society’s consciousness of the materialistic culture that is born from capital and political power.